- 국민발안․국민소환을 비롯한 기본권 강화, 다당제 아래 분권형 대통령제와 비례대표의 획기적 강화, 지방자치 강화, 기업 의사결정 민주화와 노동신분제 개선을 위한 경제민주화 강화 등이 개헌 의제다

정치권은 눈치 보며 쫓아가기 바빴다. 총선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에 대한 촛불의 분노를 허겁지겁 따라가기에 바빴다. 일부 정치인들은 비교적 일찌감치 명쾌한 태도를 보이며 치고 나갔다.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그랬다. 이 시장은 촛불 스타가 됐고, 그래서 민주당 안에서 문재인 전 대표와 선수교체를 논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됐다. 나머지 두 정치인은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개헌에 동물적 감각을 보였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공통의 슬로건이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개헌은 권력구조 개편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게이트 정국의 뇌관을 열어젖힌 방송보도를 물타기 하기 위해 스스로 블랙홀이라고 부르며 부정적이던 개헌 카드를 내밀었다는 사실에도 그다지 개의치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라는 슬로건과 함께 찾아온 개헌을 바라보는 촛불 민심은 곱지 않게 됐던 듯하다. 네들끼리 권력 나눠 갖겠다고, 그러느니 괜찮은 대통령을 뽑는 게 낫겠다는 심리가 강했을지 모르겠다. 특히, 20~30대들 사이에서는 한국사회에 기여한 공헌이 1순위로 뽑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사람을 뽑는 게 방법이라는 생각이 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은 시민들의 힘만으로 강화되진 않는다. 시민들의 힘은 헌법이라는 법과 그것이 규율하는 법과 제도에 녹아들어야 한다. 윤석규 공감정치연구소 소장이 최근 지적했듯이,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6월 항쟁의 주역들은 항쟁의 에너지를 한국사회 개혁을 위한 힘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정치적 주도권은 기성정당에 빼앗겨버렸다. 새 헌법을 만드는데도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지금의 1987년 헌법이다.

1987년 헌법을 보면 지금 우리 눈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조항이 많다. 대통령선거의 선거방식을 규정한 내용만 봐도 그렇다. 제67조 제2항은 동점자 2인이 나오면 국회에서 과반 출석에 다수 득표자를 뽑는다는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지구가 혜성과 충돌해 종말을 맞을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버젓이 들어가 있다. 당시 야권의 맹주였던 DJ와 YS의 팽팽한 기 싸움이 헌법에까지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후보자 1인일 때 유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을 얻어야 대통령으로 뽑힌다는 같은 조항 제3항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하려는 사람이 점점 드물어지는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도 아니고, 무늬만 다당제고 1당 지배체제인 사회주의도 아닌데, 대통령에 1명만 입후보한다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해의 열쇠는 그때는 얼마든지 군부독재 세력의 되치기 가능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는 데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되치기 당해 군부독재 세력 후보만 나왔을 때 유권자가 안 찍게 하는 걸 최후의 방어선으로 뒀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것도 추론이다. 누구도 당시 사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새 헌법을 제정에 참여하지 못한 데 따른 웃을 수 없는 현 주소다.

그러니, 결선투표 얘기가 나와도 문구에만 집착해 개헌 사항이라고 말하는 헌법학자가 대다수다. 헌법 제67조는 상대다수 득표제(투표율이 몇 프로든 한 표라도 더 많이 받는 사람이 뽑힌다)를 규정한 것이기에 헌법을 바꿔야 결선투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보도를 보니, 몇 해 전에는 법률로 결선투표를 도입할 수 있다고 했던 이들의 일부는 태도를 바꾸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다당제 아래에서 결선투표의 중요성을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 하물며, 지금의 개헌 논의는 단지 대통령 중임제니 분권형 대통령제니 하는 권력구조 개편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국민발안과 국민소환, 생명권과 안전권 등 시민의 기본권 강화, 지방자치 확대 심화 등을 망라한다. 적어도 5만명의 시민이 어떤 의제에 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면 국회가 뭉개지 않고 심의 처리하는 모습을 볼 날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경제민주주의의 지평을 기업의 의사결정 차원에서 열 수 있는 논의의 장도 활짝 열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좌파가 한 명도 없던 제헌의회에서 만든 제헌헌법에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촛불은 개헌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또 다른 제왕적 대통령을 뽑는 것보다 제대로 된 개헌을 빠른 시일 안에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조기대선 전에 개헌이 어렵다면, 대통령 후보의 가장 중요한 공약의 하나는 결선투표제 도입을 포함한 권력구조 개편뿐 아니라 기본권 확대 강화, 경제민주주의 보완, 지방자치 확대 심화, 선거구제와 비례대표 개편 등을 통한 대의제 원리 강화 등 개헌의 청사진과 내용, 일정을 구체적이고 일목요연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홀한 자는 그가 누구이든, 아무리 유력한 후보라 할지라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촛불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이라고 목 놓아 부르짖었다. 그래서 촛불은 대통령선거로 끝나선 안 되고 개헌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1987년이 발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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