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시험을 자신의 조교에게 대리로 보게 한 혐의로 지난 31일 긴급체포된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류철균 교수는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영원한 제국>(1993)을 발표한 유명한 소설가이다. 조선왕조 정조의 독살설을 모티브로 한 <영원한 제국>은 발간 이후 1995년 영화화되었으며, 당시 최고 인기배우였던 안성기가 출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이화여대 교수 자리까지 오른 류철균(이인화)은 소설가로서의 영예도 대학교수라는 명예도 얻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류철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야욕을 가졌다. 1997년 <인간의 길>을 발표할 때부터, 박정희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데 심취해왔던 류철균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오던 문화융성 사업에 앞장서왔고, 결국 비선실세 딸의 부정을 돕다 교수로서 소설가로서 쌓아왔던 모든 명예를 다 잃어버리게 된다.

특검에 긴급체포된 소설가 이인화 Ⓒ연합뉴스

여기서 류철균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동안 차은택에 가려져 덜 알려진 또 하나의 지식인 출신 박근혜 문화권력 부역자를 소개하기 위함은 아니다. 말하고 싶은 바는 타락한 지식인의 면모가 탄로 나기 전에, 어쩌면 오늘날 사태를 예견하는 것 같았던 그의 남다른 역사관이다.

<영원한 제국>, <인간의 길>을 토대로 류철균의 역사인식을 종합해보면, 그는 절대적 국가주의를 향한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허정훈을 통해 박정희를 시대의 영웅으로 그려낸 <인간의 길>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이겨내고 가난과 절망에 빠진 한 민족을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번영으로 이끈 구국의 영웅으로 박정희를 찬양한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와 신권 정치를 펼치고자 하는 노론 벽파의 갈등을 다룬 <영원한 제국>에서 작가는 정조의 손을 들어주며 절대적 왕권정치의 이상향을 꿈꾼다.

하지만 정조를 내세워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류철균의 바람과는 달리, 현재 정조를 박정희와 연결해서 박정희 업적을 재평가하는 역사적인 시도는 뉴라이트 사관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하다. 박근혜 정부가 유독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국정 역사교과서도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와 맞물리며 표류 중이다. 그런데 최근 역사와 힙합의 만남을 통해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는 대폭 축소된 것으로 알려진 일제강점기 역사를 전면으로 다룬 MBC <무한도전-위대한 유산>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얻고 있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 ‘역사 X 힙합 프로젝트 - 위대한 유산’ 특집

<무한도전-위대한 유산>은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인 힙합을 통해 역사를 쉽게 전달하고자 했던 의의도 크지만, 그동안 소수의 영웅 사관에 묻혀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민중 중심 사관으로 전환을 꾀한 시도가 눈에 띈다. <무한도전-위대한 유산> 특집의 진행을 도와준 설민석 강사가 이 프로그램에서 자주 했던 말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 앞장서서 나라를 구한 것은 국민이요,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이다. <무한도전-위대한 유산>이 전한 이런 메시지는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로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연이은 실책과 상상을 초월하는 권력형 부정부패에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나선 촛불집회와 맥락을 함께하며 높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31일 방영한 <무한도전-위대한 유산>의 본무대는 “국민이 나라를 구한다”는 정신에 발맞춰 시대를 이야기하고, 앞으로 국민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이상향을 설파하는 랩으로 가득했다. 래퍼들이 바라본 세종대왕은 절대적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한 군주가 아니라 글을 깨우친 국민들과 함께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지도자이며, 이순신 또한 외세의 침략에 초토화된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싸운 영웅으로 묘사된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 ‘역사 X 힙합 프로젝트 - 위대한 유산’ 특집

래퍼들이 주목한 역사가 안중근, 윤동주, 유관순 등 일제의 부당한 국권침탈에 앞장서 싸우던 인물들인 것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라를 구하는 특별한 유전자를 갖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수십, 수백 명 유관순의 DNA를 가진 사람을 스쳐 보낼 뿐 그들 자신 또한 그걸 알아보지 못한 것뿐이라고 <무한도전>을 말한다. <무한도전-위대한 유산>은 역사 속 특정 인물의 업적을 과하게 찬양하려들지 않는다. 대신, 우리 스스로가 영웅이고 힘을 합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난관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인들의 업적을 재평가하고자 한다.

국민들이 힘을 합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박정희 유신체제를 지탱했던 ‘새마을 운동’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하지만 오직 박정희 개인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국민 통합론과 달리, <무한도전>은 국민이 중심이 되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새로운 나라를 소망한다. 그리고 지난 29일 ‘2016 MBC 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무한도전> 멤버 유재석은 소수의 몇 사람만이 아닌 모든 국민이 꽃길을 걷은 2017년이 되었으면 바람으로 수상 소감을 마쳤다. 오직 절대 권력자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전체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외쳤던 어느 지식인의 몰락과 국민 모두가 꽃길을 걷는 나라를 꿈꾸는 예능 프로그램의 약진. 굳이 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아도, 역사는 누가 더 맞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연예계와 대중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자합니다. 너돌양의 세상전망대 http://neodol.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