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부끄러운 일이다. 정부가 1만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관리하면서 이들에게 어떤 국가적 지원도 하지 않기로 하는 등 사실상 정치적 탄압을 했다는 의혹은 거의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최순실 씨 등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개입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하드디스크를 교체하는 증거인멸을 했다가 또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하드디스크를 교체해 약 1주일간 쓰다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원상복구 했는데, 이 하드디스크는 지난 26일 특검이 가져갔다고 한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CBS라디오 등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직접 봤고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당시 정무수석 등이 작성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SBS 등 방송사들은 블랙리스트의 실물로 추정되는 문서와 명단에 포함될 인사들의 기준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문건 등을 보도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본 적도 없고 아는 바도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창피한 일인 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류의 문화유산 존속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 내용이 어떻든 모든 예술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따라서 가능하면 공동체 내부에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가능하도록 체제가 보장해야 한다. 예술 분야에 정부가 각종 지원을 하는 것은 이런 취지다. 정부의 입맛에 맞는 예술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문화융성’을 말하는 박근혜 정권에서 예술은 철저히 도구적으로 대상화된 채로 방치된 것 같다. ‘블랙리스트’란 다시 말하면 예술의 ‘내용’을 선별해 권력의 입맛에 맞는 것만 남겨두겠다는 취지다. 즉,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예술이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런 규정을 따르자면 현 정권에 적대적인 정치관이 예술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은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이 정권이 종종 언급하는 ‘월남 패망의 교훈’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월남 패망의 교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언론의 자유를 외치다가 결정적 순간에 정체성을 드러내며 권력을 배신한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서사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 역시 그러한 우려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오늘은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이들이 내일은 어떤 위험한 사상의 수호자로 돌변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술이 갖는 고유의 속성은 이들의 경계감을 더 키우고 있다. 예술은 논리를 통해 설득할 수 없는 상대를 감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다.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나의 의사를 남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다. 오히려 메시지가 불분명한 음악과 그림과 문학 작품이 마음을 전하는 데는 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예술의 이런 특성은 이들에게 ‘선량한 시민이 좌파들의 선동에 현혹된다’는 논리를 갖추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권력에 대한 냉소적 규정이다. 즉,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허용하라’는 식의 자유주의적 가치관들은 오로지 기득권의 당파성에 복무할 때에만 인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의 존재 의의나 가치와 같은 것들은 모두 뜬구름 잡는 얘기 들일 뿐이며 오직 유일한 것은 권력을 작동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확보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문화예술계에서 좌파들을 찍어 내쫓아야 한다.

이들의 이런 개념은 국정교과서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29일 국회 교문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에 대한 온라인 의견수렴 결과를 자기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의견수렴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23일 ‘국정교과서 절대 찬성’이라는 기계적 문구가 적힌 의견이 대거 접수됐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조직적인 의사표명이 있었다는 것인데, 결국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의견수렴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의견수렴의 결과만이 중요한 것인 셈이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관련 질의를 듣다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준식 부총리는 일견 국정교과서 도입과 즉각 시행에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교육부는 애초 2018년이 아닌 2017년에 국검정혼용을 하는 걸로 국회에 보고자료를 보냈다가 15분 만에 입장을 바꿨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전에 국정교과서 현장적용 1년 유예가 유력했고, 바뀐 입장 역시 1년 유예와 연구학교를 통한 국정교과서 시범도입이 핵심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입장이 바뀐 정도가 아니라 막판까지 오락가락하는 혼란 속에 있었던 것이다.

국정교과서는 편향적인 내용도 문제지만 교과서 그 자체로서의 퀄리티도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제작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어 과다한 연구비를 지급하면서까지 국정교과서 내용을 만들어야 했다는 보도가 있었던 걸 보면, 진심으로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걸 볼 때, 필진들도 이념적 철저함을 관철하기 위해 여기에 참여했다기 보다는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믿지 않는 일’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도 그렇다. 과연 블랙리스트란 여기에 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예술작품 또는 평상시 발언 등을 꼼꼼하게 평가한 결과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명단에 오른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끼워 넣은 것을 보면 그렇다. 일부 인사들은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일이 없는데도 블랙리스트에 그런 이유로 올라가있다며 황당하다고 말한다.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이 일을 대충 했다는 점을 다행스러워해야 할까.

관료들이 자기가 진심으로 믿지 않는 일을 권력이 요구한다는 이유로 적당히 하다 보니 사태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보면 박근혜 정권은 이중적 냉소에 포위돼있었던 셈이다. 당위와 가치를 믿지 않는 권력자와 권력의 합리성과 성실성을 믿지 않는 관료들의 존재가 이를 보여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바로 이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야당의 지도자들은 국민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이 대목에서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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