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이 검찰에 출석하는 모습을 보며 기득권의 카르텔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에 대해 생각한다. 송희영 전 주필은 26일 검찰에 출석하며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추운데 고생들 하시네 정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안해서 하는 말인지 뻗대보자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전자의 의미였으면 한다. 후배 언론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떳떳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송희영 전 주필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정치적 냉소주의의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조선일보가 정권이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은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는 결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7월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처가의 부동산 거래 의혹을 다뤘고 이를 시작으로 TV조선을 통해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문제를 집중 보도했다.

이 덕에 조선일보가 오랜만에 언론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청와대가 사실상 조선일보를 ‘부패기득권 세력’으로 지목하고 송희영 전 주필과 대우조선해양 경영진의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면서 이런 여론은 일거에 뒤집혔다. 결국 조선일보 스스로가 급하게 되었으니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보복’에 나선 게 아니었냐는 것이다.

남상태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연임 로비에 연루된 의혹을 받는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이 26일 오전 검찰 부패범죄특별수사단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별관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비슷한 식의 인식은 최근 논란이 된 최순실 씨의 태블릿PC 논란에서도 발견된다. JTBC가 단독 보도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이 물건은 국정농단 의혹의 ‘스모킹 건’으로서 여론의 조명을 받았다. 이에 대한 보수세력 일각의 대응은 태블릿PC가 최순실 씨의 소유가 아니며 JTBC가 불법적으로 이를 입수하여 보도하였다는 것이다. JTBC가 이러한 무리수를 둔 이유는 정치적으로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유흥업소 출신 고영태 씨가 자기만 살기 위해 이에 협조하였다는 것이 이 놀라운(?) 스토리의 핵심 얼개이다.

조선일보와 JTBC가 과연 그런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사건의 본질은 이것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거나 ‘이 개도 저 개도 모두 똥 묻은 개’라는 식의 주장은 결국 정치적 냉소주의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기득권이 무슨 당위와 명분을 말하든 다들 뒤로는 사익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속고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시사에 관심을 거두고 먹고 살 길이나 각자 알아서 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외면해서 남는 것은 같은 사건이 다시 벌어지는 황당한 체제의 존속일 뿐이다. 그 황당함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이런 신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조선일보가 송희영 전 주필을 보호하기 위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조준하였더라도 떳떳치 않은 이유 때문에 권력의 붕괴가 눈앞에 닥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매양 일어나는 사건들처럼 송희영 전 주필과 청와대가 상부상조 동거동락하는 사이였다면 애초에 현직 민정수석의 비리를 보도하지 않는 것으로 ‘딜’이 성사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조선일보를 필두로 하는 보수세력의 집권전략과 언론의 생리가 함께 작용하였고, 이게 권력에 상처를 주었으며, 송희영 전 주필에 대한 수사는 권력이 반격에 나선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JTBC의 태블릿PC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태블릿PC의 소유 관계나 JTBC의 태블릿PC 입수 경로는 국정농단이라는 의혹의 본질과 별 관계가 없다. 태블릿PC가 다른 사람의 소유였다고 하더라도 이 도구가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행위를 위해 쓰여졌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JTBC의 태블릿PC 입수 경로에 대한 의혹은 저널리즘의 잣대로 따로 다룰 일이다. 이 문제를 모두 뒤섞어서 꼬리가 개를 흔드는 형국으로 만드는 것은 정치적 냉소주의의 확대로 이어질 뿐이다.

정치적 냉소주의의 가장 큰 해악은 정치 자체를 무장해제한다는 점이다. 정치가 무장해제 되면 남는 것은 각 세력 간의 ‘힘 대결’ 뿐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정점으로 해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나서 한국 사회를 우측으로 붙들어 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의혹을 떠올려 보자. 사망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통해 드러난 여러 공작들은 기만적 통치술일 따름이지 모범적인 정치의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박근혜 정권의 정치는 냉소적 인식을 스스로 부추기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열중했다.

이 정권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는 정치에 대한 스스로의 냉소적 관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유승민 의원에 대한 정치적 핍박과 ‘배신의 정치’라는 용어가 대표적이다. 유승민 의원이 저 유명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제기한 것은 ‘노선의 문제’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자신을 정치적으로 배신한 걸로 보았다. 요즘 밝혀지는 사실들로 볼 때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최순실 씨의 영향이 컸던 걸로 보인다. 이 영향으로 ‘진실한 친박’들이 태어났고 4·13 총선 구도는 엉망이 되었다. 장삼이사들이 갖는 냉소적 인식을 이 나라 최고 권력자와 그의 비선실세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다.

친박계 '좌장'으로 불리는 서청원 의원이 2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이른바 친박들이 행하는 것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전횡으로 분당을 눈앞에 둔 친박들이 쓰는 언어는 거의 다 ‘나만 잘못했느냐’로 요약할 수 있는 수준이다. 비박들의 인적청산 요구에 대해 친박의 좌장이라는 서청원 의원이 지난주 기자들을 향해 속사포처럼 내놓은 항변이 그렇다. ‘최순실을 어찌 알았으며, 박근혜 정권 탄생에 다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이제와서 투사인 척 하는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는가’라는 취지다. 자신들이 만든 정권을 어떻게 책임질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고 ‘어차피 다 똥 묻은 개’라는 논리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냉소주의에 맞서 자신의 역할을 강변해도 모자랄 판에 이에 편승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신뢰할 리 만무하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싸고 나오는 음모론에 대한 논쟁 구도가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네티즌 ‘자로’는 오랜 기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추적해 <세월X>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개에 시간이 걸리고 있으나 언론을 통해 언급된 내용을 보면 결론은 ‘잠수함 충돌설’에 가까운 것 같다.

박근혜 정권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을 모두 밝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이런 저런 추측과 주장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세월호 특조위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음모론적 방식으로 은폐돼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확신은 정치가 스스로의 기만적 성격을 더욱 명확히 함으로써, 즉 대중적 인식 속의 냉소주의를 오히려 강화함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은 이러한 ‘냉소적 믿음’이 ‘진실’이었다는 점을 드러내 이 냉소주의의 행진에 화룡점정을 찍고 있다.

도대체 이 진창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정치와 언론의 대오각성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그물처럼 얽혀있는 이해관계들은 근본적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전히 앞으로 내딛는 한 걸음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한 걸음을 위해서는 또 국민의 관심과 질책, 평가가 필요하다. 국민의 힘으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끝내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