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의 스타게이트, 싼티나는 SF영화로 여름을 날려보내는 법 _ 남현지 기자

그러니까 지금, ‘내 인생의 블록버스터’로 운을 떼야 하는 이 사람은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엄친아들과 한 타스로 묶여 조직적 강제 관람을 해야 했던 첫 영화 ‘우뢰매’ 이후 액션 씬과 압도적인 스케일, 긴박한 화면 전환 앞에서는 극심한 멀미로 인해 차라리 잠을 청해야 하는 곤란한 관객이었다는 고백부터.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거리가 먼 인생도 살다보니 몇 년 전쯤부터 SF·판타지 영화는 제법 애호 대상이 되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아야 락이 생기는 법, 그렇게 남들과 다르게 누구보다 뒤늦게 대작들을 뒤적이던 일 년 전 여름을 그야말로 날려버린 영화가 있으니 스타워즈도 스타트랙도 아닌 1994년작 ‘스타게이트’ 되시겠다.

십오 년 전 블록버스터라 눈감아주기에도 조악한 이 SF영화, 고대 피라미드에서 다른 우주로 통하는 돌덩어리 게이트가 발견되고 그 게이트를 통과하면 다른 행성이 나온다는 설정에서 출발하는데 다른 행성도 이름만 다른 행성일 뿐 지구에서 본 피라미드가 또 나온다. 참 저렴하게도 지구나 다른 행성이나 ‘사막, 돌, 찢어진 옷 입은 사람들’ 배경에(고대 이집트 신화를 바탕으로 외계인 지구 문명 창조설에 기댔으니 간소해도 되고) 웅장한 우주선도(게이트가 있으니까 걸어가면 되고) 멋진 무기도(창에서 빔 나오면 되고) 하다 못해 정교한 특수분장도(악의 무리는 배에 뱀 집어넣어서 구분하면 되고) 등장하지 않는다. 어려운 과학적 지식 따위 없어도 슬렁슬렁 말이 되는 이 초간단 SF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연결하는 ‘게이트’라는 아이디어와 신화적 요소, 그리고 개성 있는 캐릭터 등으로 흥행을 거둔 후 TV 시리즈물로 안착해 지금까지도 그 길고 긴 수명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내 인생의 ‘블록버스터’인 이유는, 한 편의 영화를 다 보고난 이후에 십여년이 넘게 방영된 TV물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 무지막지한 분량은 골방에서 헉헉대던 지난 여름을 고스란히 날려 보내게 했다는 것. (족히 200편은 넘었을 게다! ) 그 세월동안 나름대로 세련된 SF의 형식을 갖추기도 했지만, ‘스타게이트’ 전 시리즈의 묘미는 우주 탐사에 나선 인간이 낯선 존재와 빚는 갖가지 갈등 축의 에피소드에 있으니 남몰래 키워온 우주정복의 꿈 따위는 차라리 버려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고고학과 SF, 그리고 일일드라마 같은 아웅다웅을 버무려놓은 스타게이트 시리즈를 만나는 첫 번째 관문, 촌티나서 정겹기까지 한 이 영화를 무책임하게 권해본다. 우주를 떠돌다 정신차리고 보면 가을일 것이다.

호로비츠를 위하여, 소박했던 나의 꿈 _ 송선영 기자

화려한 액션과 연달아 터지는 폭탄,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겨누는 총, 그 안에 숨겨진 엄청난 스릴감…. 내로라하는 최고의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을 꼽으려 했으나, 딱히 떠오르는 영화가 없다. 아주 오래전,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한 아저씨의 ‘I'll be back’ 한마디가 멋있어 보인 적도 있으나, 안타깝게도 이게 전부다. 영화를 ‘시끄러운 영화’와 ‘시끄럽지 않은 영화’ 라는 요상한 기준으로 나누는 나로서는, 정신없이 터지는 폭탄 소리와 우당탕탕 총소리 등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한 블록버스터 영화는 웬만하면 잘 보지 않는다. 그래서 꼽았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나 나에게는 특별한 초특급 블록버스터(?)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유명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루지 못해 열등감에 빠져있는 피아노학원 원장 지수(엄정화)와 세상을 등진 채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혀 살아가는 꼬마 경민(신의재).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피아노학원을 어지럽히고 도망가는 경민이 밉던 지수는, 어느 날 경민의 천재적인 절대 음감을 발견한다. 그 날부터 지수는, 이루지 못했던 피아니스트의 꿈을 경민을 통해 이루고 싶은 마음에 그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결국 ‘피아노’를 통해 서서히 친구가 되고, 서로를 통해 위안과 위로를 받는다.

실제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은 피아노학원 옆에 살았다. 지리적 혜택(?)을 입어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는 더 자주 피아노를 접할 수 있었고, 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나보다 3살 많은 나의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잘 치기로 유명했다. 집에 피아노가 들어왔던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바닥에 가까웠던 나의 피아노 실력과는 달리 언니는 그 어려워 보이는 피아노 검은색 건반(#)도 유유자적 만져가며 피아노를 쳤다. 그 모습에 열등감을 느껴 부득부득 이를 갈며 혼자 검은색 건반이 많이 들어간 찬송가를 연습하기 시작했고, 독학 덕분인지 저질이던 나의 피아노 실력은 이제 꽤 들어줄 만한 상태가 됐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다소 진부하고, 번한 이야기 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가 끝날 무렵 느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진한’ 감동과 밀려드는 많은 감정들 덕분에 한 동안 멍했다. 유명 피아니스트를 꿈꾸지는 않았지만, 더 많이 배우지 못해 피아노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영화를 보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혼자만의 세계에 살던 아이가 음악을 통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음악이 주는 위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무언가에 대한 열등감과 세상과의 단절, 이는 영화 속 등장하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의 많은 외톨이들, 무언가에 상처 받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은 이가 있다면 이 영화를 통해 상처난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영화의 엔딩에서는 꼬마 경민이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한국에 돌아와 연주회를 갖는 장면이 나온다. 특별출연한 피아니스트 김정원씨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직접 연주한다. 이 엔딩 장면에 반한 나는, 꼬깃꼬깃 모아놓은 쌈짓돈으로 김정원 피아노 리사이틀 R석을 구매했다. 공연장 맨 앞 자리에서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왈랑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기억이 떠오른다.

'반지의 제왕’만큼 빛났던 시절의 우리들 _ 나난 기자

내가 본 블록버스터 영화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것은 딱 하나, <반지의 제왕> 뿐이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촌스러운 거고, 또 다른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애국자란다. 그렇다. 이쯤 되면 짐작했겠지만 난 웬만하면 한국영화만 본다. 그런 내가 어쩌면 처음으로 선택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반지의 제왕>이다. 블록버스터란 이름에 걸맞게 총 제작비 2억 7천만 달러, 전 세계 30억불의 가까운 흥행수입을 기록한 <반지의 제왕> 123.

세계를 지배하려는 탐욕으로 만들어진 절대반지. 그 반지를 가지고 있던 빌보는 111살의 생일을 맞아 조카인 프로도에게 절대반지의 정체와 그 반지를 파괴해야만 세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된다. 프로도는 그 임무를 맡고 엘프와 인간, 난쟁이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그곳에서 반지원정대가 꾸려져 프로도는 반지를 가지고 샘과 함께 ‘불의 산’으로, 남은 이들은 점점 커져가는 사우론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판타지 액션 영화가 <반지의 제왕>이다. 그 장르에 맞게 화려한 영상은 아직 눈에 선하다. 특히 2편에서 선보인 오크들과의 전쟁장면은 단연 으뜸으로 꼽을만하다. 이중 인격을 보이며 반지에 집착하는 골룸(스미골)도 빼놓을 수 없는 <반지의 제왕>하면 생각나는 주인공이다.

딱히 재밌는 일이 없어도 동아리방에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사건이 생기고 즐거웠던 학생신분이던 시절. 저녁이 되면 부실한 술안주에 소주한잔으로 날을 새고 이윽고 새벽에 친구 A의 자취방으로 건너가 2차를 하고 좁은 방에서 모두 자려니 모두들 테트리스 자세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그때.

어느 날 친구 B가 흥분된 목소리로 “얘들아, 반지의 제왕 3편이 개봉한대”라며 들어왔다. 유유상종이고 초록은 동색인지 “반지의 제왕, 재밌냐?”며 당시 친구들의 반응은 그저 시큰둥했었다. <반지의 제왕> 마지막 편인 3편 ‘왕의 귀환’ 편 개봉을 목 놓아 기다렸던 B가 머쓱해지는 상황이 연출됐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른한 점심 눈이 똥그래지며 ‘요거 재밌겠는데’라고 모두 눈이 반짝거렸던 것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치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반지의 제왕 3편 개봉전날 1편 ‘반지원정대’와 2편 ‘두개의 탑’을 보면서 밤새고 개봉 당일 날 조조할인으로 영화를 보자는 약속을 해버렸었다. 물론 ‘뭐, 재밌는 일 없나’라며 무료하던 때 귀에 <반지의 제왕>이 들어왔던 것이지 영화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결정됐다. 며칠 몇 시에 C의 집에서 모일 것, 저녁밥으로 닭볶음탕을 만들어 먹는데 이것은 D가 만들고, 돈은 E가 대고, F는 <반지의 제왕> 1, 2편 볼 준비를 해놓고, G는 가까운 영화관 몇 시에 상영하는지 알아보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것은 H가 맡는다 등등. 그래서 성공했냐고? 1편보다 잠든 친구도 있고, 2편보다 중간에 도망간 친구도 있고, 2편까지 끝까지 보고 다음날 영화관에서 꾸뻑꾸뻑 졸다 나온 친구도 있었다. 당연했던 것이 <반지의 제왕>은 1, 2, 3편 모두 상영시간이 3시간 가까이 되는 것들이다. 이것이 내가 본 블록버스터 <반지의 제왕>에 대한 기억이다.

솔직히 ‘<반지의 제왕>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영상에 눈을 뺏겼었고 잠시 다른 영화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난 여전히 한국영화를 편애하고 있고 작은 영화들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 설령 <가족의 탄생>이나 <싱글즈>와 같은.

그런데 내 인생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반지의 제왕>이 문득 떠오른 것은 아마도 당시 친구들과의 재밌었던 추억 때문일 것 같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버린. <무한도전>의 유재석도 웃고 지나갈, 지금은 ‘왜 그랬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무모했던 도전. 그때 우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깔깔거렸던 ‘와우리안’이었다. 가끔은 함께 절대권력에 맞서기도 했던.

“친구들아, 이 글 보면 연락해라. 이번엔 <해리포터>에 도전해볼까나?”

※와우리안 : 와우리 지역에 서식하며 공생하는 무리들을 일컫어 부르는 말(이 역시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다 지은 우리만의 약속된 언어)


‘지구를 지켜라'의 무한했던 B급 매력 _ 곽상아 기자

‘내가 진짜 미친 게 아닐까?’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늘 괴롭기만 하던 대학시절의 어느 여름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동네 비디오대여점에 갔다가 물파스를 들고 있는 신하균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빌려보게 된 이 영화는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작은 계기가 된 강렬한 기억으로 내 가슴속에 각인돼 있다.

2003년 4월 개봉한 이 영화는 외계인으로 인해 지구가 곧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믿는 병구(신하균)의 ‘지구 지키기 프로젝트’를 다룬다. 개기월식까지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에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병구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병구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유제화학의 사장 강만식(백윤식)을 납치한다. 강만식을 괴롭히는 데 동원되는 방법은 머리 빡빡 밀기, 때타올로 피부 벗겨낸 뒤 물파스 바르기 등. 언뜻 보기에 피해망상증 환자의 엽기행각을 다룬 코미디 영화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낙오자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겨냥하며 이 시대를 꼬집는다.

편집증적 눈빛의 병구, 머리를 빡빡밀고 원피스를 입은 강만식, 그 나이에 아직도 인형가지고 노는 순이(황정민)…. B급 찌질함으로 가득찬 이 영화를 보며 내가 밤새도록 대성통곡을 했던 이유는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도 당하기만 하다가 결국 사회 구석으로 내몰린 병구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해 막연한 불만만 가졌을 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와 당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직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 괴로움을 애써 피하고 싶었던 자기보호본능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고로 무능력자가 된 아버지, 화학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려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 구사대에게 맞아 죽은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화면속 병구를 보며 어느새 나는 콧물, 눈물 범벅된 얼굴로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응어리들을 꺼내 마주하고 있었다.

지구에는 과연 희망이 있을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한참 뒤까지도 사람을 홀려놓는, 무한한 B급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 한여름 속 여느 주말 저녁, 슬리퍼 끌고 ‘지구를 지켜라’ DVD 빌리러 가보는 건 어떨까.


‘화씨9.11,’ 자유주의자들 괴롭힌 블록버스터 _ 유영주 기자

두 달 안에 ‘말랑미디어’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말했더랬다. 기획자가 그 기회를 서둘러 만들어주었다. ‘내 인생의 블록버스터’를 짧게 쓰면 된단다. ‘독립운동’(ㅋㅋ)이나 해온 나한테는 여간 곤혹스런 주제어가 아닐 수 없다. 기획자는 ‘딱이 곤란하면 우뢰매라도 쓰세요’ 라고 안내했는데 돌이켜보니 우뢰매의 인상착의조차 기억이 안 난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블록버스터를 전세계적으로 4억 달러 이상 매출을 올리거나 때에 따라서는 제작비 규모가 크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가리키기도 한다고 정의해놨다. 조스(1975)가 최초이고, ‘스타워스’(1977)가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다는군. 이런 기준의 블록버스터를 남들 보는만큼 보지 않은 건 아니나, 작품 하나를 놓고 감상을 늘어놓자니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경험은 일천하나 그래도 인터넷언론을 하며 독립미디어운동의 언저리를 왔다갔다 해온 지라 주류영화 중에서도 흥행 자체가 기준이 되는 블록버스터의 감상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해서다. 그렇다고 뒷짐을 지고 제국주의 영화 산업 내지 영화산업의 자본화의 맥락을 거론하자니 쟁여놓은 컨텐츠도 없고. 독립영화로 블록버스터의 지위를 인정받은(?) ‘워낭소리’나 ‘똥파리’ 같은 작품을 써볼까도 했지만 역시 내키지가 않는다.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영화평을 쓴 유일한 글이 하나 있어 우려먹기로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블록버스터의 반열에 올려도 빠지지 않을듯 한데, 2004년 7월에 민주노동당이 섭외해 국회의원회관에서 처음 상영한 ‘화씨9.11’이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당직자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시민이 관람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건 최초라며 의기양양해하던 기억도 나는군.

마이클 무어는 영화 전반부에서 미국의 3대 대테러전쟁을 잉태한 배경에 1997년 '새로운미국의세기를위한프로젝트'(PNAC)의 출현이 있었다고 들춰낸다. PNAC가 부시행정부를 장악하고서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폭격에 열을 뿜었다는 것. 도널드럼스펠드, 콘돌리사라이스, 딕체니, 월포이츠 같은 희대의 범죄집단은 인생의 목표를 오로지 미국 국방비의 증액에 두었다고. 3백만 고용인의 생존 보장과 1만 명에 달하는 로비스트, 브로커, 무기밀매상의 지지 속에 이뤄졌다고 한다. 록히드마틴, 레이시온, 제노럴다이내믹스, 보잉, 노드롭그루먼 등 군산 메이저들에게는 향후 10년 이상의 안정된 돈벌이 프로젝트를 약속했고.

마이클 무어는 월포이츠가 머리 빗에 침을 묻혀가며 머리를 손질하는 장면, 부시 집안이 오사마 집안과 맺어온 내력의 폭로, 부시 대통령이 취임 후 9.11 테러까지 약 8개월간 42%의 기간을 휴가로 보냈다는 이야기, 허무맹랑한 애국법(우리 나라의 테러방지법) 입법 취지와 과정, 2002년 1월 악의 축(axis of evil)을 발표 배경과 그 해 9월 발표한 신국가안보전략(New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USA, 이른바 부시독트린)의 본질 따위를 ‘화씨9.11’에 오롯이 담았다.

마이클 무어는 이라크전쟁에 동원된 동맹국도 비웃는다. 영국, 일본, 폴란드, 터키 같은 나라도 있지만,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모로코의 지뢰 제거 원숭이군단, 그밖에 잘 안 알려진 나라들을 소개하면서. 이윽고 마이클 무어는 미군의 민가 습격, 알라신에 대한 어머니의 호소, 불에 탄 시체, 포로 학대, 피범벅된 아동과 여성...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마이클 무어는 영화 후반부의 상당 부분을 애국주의를 자랑하는 '미국보수군인집안'의 한 어머니 이야기로 채웠다. 전쟁터에 아들을 보낼 때까지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던, 반전 시위대를 혐오하던 '미국보수군인집안'의 한 어머니가 아들을 잃고 나서 애국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드라마처럼 보여준다.

이 영화가 국회에서 상영된 시점은 2004년 7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을 약속했던 2003년 4월로부터 1년 3개월 만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을 선동하고 다녔던 유시민 같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걸로 추정된다. ‘화씨9.11’은 대한민국의 보수우익들보다 자유주의자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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