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대권주자들을 중심으로 한 개헌논의가 조금씩 진전돼가고 있다. 새누리당 탈당파, 더불어민주당 내 비주류, 국민의당과 안철수 전 공동대표, 손학규 전 의원 등이 개헌에 대한 구체적인 발언을 내놓으면서다. 그러나 개헌 그 자체보다는 개헌을 매개로 한 합종연횡에 더 많은 무게가 쏠리고 있어 우려된다.

대권주자들이 내놓는 주장을 보면 일단 대선 전 개헌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22일 ‘보수와 진보 함께 개혁을 찾는다’ 토론회에 참석한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대권주자들이 개헌을 공약하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를 거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 후 개헌’이라는 로드맵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는 그간 개헌 논의에 부정적 입장을 밝혀 왔으나 최근 ‘제7공화국’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손학규 전 의원과 정치적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입장을 변화시켜왔다. 이날 이 발언은 이런 움직임에 ‘쐐기’를 박은 모양새다.

조기 대선의 초입에서 야권의 잠재적 대권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가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보수와 진보 함께 개혁을 찾는다' 토론회에서 만나 자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헌 논의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더불어민주당 내 비주류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개헌 논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였다. 나머지 인사들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등의 원칙적 차원에서 동의했을 뿐 구체적 구상을 내놓은 바 없다.

그런데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김부겸 의원 등이 개헌에 대한 보다 진전된 발언을 내놓으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특히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은 2017년 선출될 대통령의 임기를 2020년까지로 조정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어쨌든 다음 대통령이 임기 내에 개헌을 완료해야 한다는 구상에 동의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의 개헌 논의는 마치 ‘문재인 포위망’ 비슷한 것으로도 비춰지고 있다. 앞서 토론회에 참석한 손학규 전 의원의 메시지가 그렇다. 손학규 전 의원은 “개헌은 개혁이고 호헌은 기존 체제와 패권 세력을 지키자는 것인데 개헌을 이긴 호헌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개헌 논의에 부정적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겨냥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같은 자리에서 문재인 전 대표는 개헌과 관련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가짜 보수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시대를 대청소하고 국가를 대개조하는 일은 여야를 떠나 이념과 정략을 내려놓고 함께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등의 발언을 내놓을 따름이었다. ‘야권 1등’인 문재인 전 대표로서는 현재 구도를 뒤흔들 수 있는 모든 요소에 대해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개헌을 고리로 한 정계개편 논의에 기름을 부을 수 있는 요소는 새누리당 분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이다. 국민의당은 연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겠다는 비박계 인사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민의당과 새누리당 탈당파가 정치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이에 대해 “당분간이건 앞으로건, 비박들과 우리가 연대 혹은 연합을 한다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반기문 사무총장의 귀국 이후에도 같은 입장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22일 반기문 사무총장 측으로부터 국민의당과 함께 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면서 “반기문 사무총장 측에서 뉴 DJP 연합을 하자고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새누리당 탈당파들은 반기문 사무총장과 긴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들이 추진하는 ‘보수신당’에 합류할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반기문 사무총장이 두 세력 간의 ‘아교’ 역할을 할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자리에서 박지원 원내대표는 “이번 대선에는 개헌이 어렵지만 개헌을 약속했기 때문에 손학규와 정운찬이 국민의당으로 올 수 있게 됐다”고도 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최근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결국 비(非)-박근혜 비-문재인 성향의 대권주자들이 모두 모이는 ‘제3지대’ 정계개편을 고리로 개헌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기자회견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구상이 한국정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의문이다. ‘문재인 포위망’이건 개헌이건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상이 새누리당 탈당파가 참여하는 ‘보수재집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보수가 집권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수정치는 파탄적인 박근혜 정권의 탄생에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니 정치적 노선을 명확히 하고 비전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심판을 구하는 게 먼저다.

새누리당 탈당파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유승민 의원은 23일자 한겨레 인터뷰에서 “좌파가 집권하면 망한다는 논리보다는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보수를 혁명적으로 개혁해 국민의 신뢰를 다시 받겠다는 입장”이라면서 “보수가 잘못해놓고 좌파 공격해서 선거를 치르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좌파’란 사전적 의미라기보다는 현재의 야권을 일반적으로 이르는 말로 들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식의 제3지대 정계개편은 보수정치의 새로운 옷 갈아입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다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말하지만 그 본질은 보수정치의 ‘정략’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를 채택한 국가의 정치가 모두 모범적인 것도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은 정치 그 자체가 바뀌어야 극복 가능하다. 권력구조의 개편으로 완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민의 과연 권력구조 개편에 포인트를 맞춘 개헌을 원하느냐도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물론 각종 여론조사는 국민이 개헌을 원한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개헌을 원한다’는 대답은 대한민국의 현 체제가 다수 국민의 사회적 불만을 해소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지, 1987년의 ‘직선제 쟁취’와 같은 구체적 요구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말로 개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라면 순서를 거꾸로 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구하고, 정치적 전망으로 가공해야 한다. 권력구조 개편은 이 위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라는 표현에는 거의 모든 경제정책을 집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1987년 헌법에 들어간 이 표현이 기득권의 폭주에 대한 일정한 제동장치 역할을 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시대정신을 담는 개헌이 아니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은 결코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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