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의 제휴사 중 한 곳인 오마이뉴스에서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를 소재로 연재하고 있는 기획시리즈의 일부 기사를 옮겨 싣는다. <편집자 주>

▲ '문자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식 언어'와 '구술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공식 언어'는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를 구분짓는 하나의 열쇠다. 독백형 글쓰기에 익숙한 신문사가 인터넷의 구술성에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 오마이뉴스 그래픽

학회나 포럼 등의 '점잖은' 모임에 가면 항상 느끼는 게 있다. 사회적 권위나 높은 학식을 자랑하는 발표자는 거의 예외 없이 지루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듣는 사람은 하루의 계획 (시간이 남으면 한 주나 한 달 계획)을 세우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때로는 부족한 잠을 청하면서 건설적인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언젠가 학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앞에서 열거한 모든 '과외활동'을 다 했는데도 앞의 권위자의 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듣던 옛날이야기였다.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손자를 재우려고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이야기에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지곤 했다.

한 손으로는 부채질, 다른 한 손으로 파리와 모기를 쫓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 품은 냉방시설 잘 된 멀티플렉스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재미있고, 편안하고, 시원한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따뜻한) 상상의 요람, 즉 '가상현실 극장'이었다. 할머니는 많이 배우지도,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도 아니었으나, 그 이야기 속에는 평민의 언어로 표현되는 '상식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이쯤에서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을 것 같다. 할머니 이야기와 '뉴미디어'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는 '뉴미디어'라는 뭔가 차갑고 기계적이고 세련된 언어와 정 반대의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할머니의 이야기야말로 뉴미이어를 이해하는 열쇳말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아울러 그 (눈물 나게 지루한) 학식 넘치고 고상한 연설이야말로 케케묵은 '올드미디어'의 전통이라는 게 이 글의 요지다.

뉴미디어와 옛날 이야기

앞에서 예로 든 두 가지 이야기, 즉 '고상하고 학식 있는 언어'와 '평범하고 쉬운 언어'는 인류역사에 되풀이되어 온 담론양식의 싸움이기도 하다. 앞의 '점잖은 말', 즉 '공식언어'는 지배층의 언어로 '문자성(literacy)'을 특징으로 한다.

예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학식'의 상징이었으며, 지금도 문맹률은 한 사회의 교육수준을 평가하는 지표로 사용된다. 문자언어는 논리·추상성·객관성을 지향하는 3인칭 언어다. 점잖은 글에 '나'와 '너'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필자'와 '독자'라는 3인칭 시점만이 존재할 뿐이다.

반면에 '비공식 언어'는 평민의 언어로 '구술성(orality)'을 특징으로 한다. 구술언어는 감정·구체성·주관성을 지향하는 1인칭 언어다. 그러나 이 1인칭 언어에는 항상 상대방이 전제되어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듣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구술언어는 '소통'하는 말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 언어다.

3인칭 시점으로 쓰이는 문자언어는 상대방이 전제되지 않은 '혼잣말'이다. 설사 특정 상대를 전제로 쓰인 글이라 할지라도, 그 글은 언제나 이미 쓰인 과거형 언어다. 그런 면에서 문자언어는 '자기와의 소통'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권위를 자랑하는' 이들의 언어가 왜 그렇게 지루한지 이해가 된다. 글쓰기, 즉 '독백'에 익숙해진 이들은 곧잘 글과 말의 차이를 혼동한다. 글쓰기와 말하기는 전혀 다른 소통양식이다. 글을 읽는다고 말이 되지는 않는다.

글쓰기를 위해 인터뷰를 해 본 사람은 이 차이를 경험했을 것이다. 아무리 유창하고 정연하게 들리는 말도 글로 적어 그대로 옮겨 놓으면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비논리적인 언어가 된다.

'조중동'은 왜 인터넷을 싫어할까

신문은 인터넷을 싫어한다. 물론 인터넷에 영향력도 잃고 광고도 빼앗겼으니 미울만도 하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듯, 특히 보수언론이 인터넷을 싫어하니 말이다. 왜일까?

보수언론은 인터넷의 언어를 싫어한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한 주된 이유가 '천박한 언어'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보수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의 '평민언어'를 경멸했고, 같은 이유로 인터넷을 싫어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인터넷 언어는 전형적인 구술언어다. 일상적으로 격식이 파괴되고 문법이 무시된다. 당연하다. 인터넷은 상대와 즉각적인 교류가 가능하다는데서 오프라인의 대화와 유사한 양식을 갖기 때문이다. 독백형 글쓰기에 익숙한 신문사가 인터넷의 구술성에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흥미롭게도 보수언론의 '반구술적' 저항은 인터넷판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댓글기능을 차단하고 ('권위 있는' 칼럼니스트들이 흔히 이런 짓을 한다), 마지못해 운영하는 게시판에도 실명을 강요함으로써 '겁주기 효과'를 노린다. '평민의 언어'를 싫어해서, 한자나 영어를 섞어 쓰는 방식으로 '낮은 것들'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보수언론과 권위자들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소통'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여론 지도층'께서 말씀하시면, 아랫것들은 고분고분 들으며 받아적는 것이다. 어디 감히 토(댓글)를 달아?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의 그 좋은 인터넷 시설을 마다하고 굳이 라디오로 '국민과의 대화'를 하게 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첫 방송 후 청와대는 '아날로그 IT시대의 감성을 어루만졌다'고 자평했는데,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날로그 화법'은 독백을 소통으로 믿는 문자언어시대의 전통이며,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어루만지는' 행위는 수직적 위계관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위터, 왜 인기일까?

▲ '문자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식 언어'와 '구술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공식 언어'는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를 구분짓는 하나의 열쇠다. 독백형 글쓰기에 익숙한 신문사가 인터넷의 구술성에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 오마이뉴스 그래픽
'트위터'는 가끔 '마이크로 블로깅(micro-blogging)'이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불린다. '짧고 단순한 블로그 쓰기'라는 의미다. 사실 초기에는 거의 모든 블로그가 짧고 단순했다. 당시 누구든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직업적 훈련을 받은 기자가 뛰어들었고, 높은 식견을 갖춘 전문가들이 가세했다.

블로그의 글은 점점 길어지고 어려워졌다. 이제 평범한 블로거의 글은 세련된 문체와 뛰어난 학식을 갖춘 글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구술성'이 지배하던 인터넷 공간에 '문자성'이 침투한 것이다. 물론 전문 블로거의 글 가운데 상당수는 기존 언론과 차별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대중적 소통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지난 해 말, 미국의 IT잡지인 <와이어드>는 이제 막 블로그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 따뜻한 충고의 말씀을 보낸다. 하지 마라. 지금 블로그를 하고 있다면 폐쇄하라. 4년 전만 해도 블로그는 할만했다. 이제 블로그는 더 이상 평범한 이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재치를 발휘하는 공간이 아니다." - 폴 바우틴, '블로그를 닫아라'(<와이어드> 2008년 11월호 28쪽)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트위터'였다. 140자 이내의 짧은 글은 '문체'와 '권위'가 메시지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 짧게 말하고 재빨리 반응하는 트위터의 글은 인터넷 언어의 구술성을 더없이 잘 보여준다. 이처럼 강화된 구술성은 휴대전화(로 말하기)가 인터넷에 미친 영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트위터의 모토는 "지금 뭐해?(What are you doing?)"다. 이것은 전화하는 상대에게 가장 많이 묻는 말이기도 하다. 트위터는 사실 새로운 형태의 블로그라기보다는 초기의 블로그 문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가깝다.

'플리커'와 '엄지뉴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사진의 활용이 극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디지털카메라 사용자가 늘어나고 휴대전화에 카메라가 장착됨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찍어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사진을 상대에게 보내는 것은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만큼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최근 카메라 가운데는 컴퓨터에 연결하지 않고도 인터넷에 직접 사진을 올릴 수 있는 모델도 있다).

사진과 짧은 글을 결합시키는 것은 아주 효율적인 소통수단이다. 사진은 그 자체로 말을 하므로 짧은 메시지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게다가 사진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성을 전하는 데에도 적합하다.

'감성'은 구술언어의 핵심적 특성이다. 최근 들어 '플리커'나 '엄지뉴스'처럼 이미지 중심적인 매체가 인기를 끄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흥미롭게도, 이미지는 언제나 '대중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신문에 처음 흑백사진이 도입되었을 때 그 '천박성'을 비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그러나 이후 거의 모든 신문이 사진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다음에는 컬러사진을 처음 쓴 신문에 같은 비난이 쏟아졌다).

트위터·플리커·엄지뉴스의 인기는 현재 인터넷 환경에 대해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초심을 잃지 마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민주적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 이 사실을 잊고서는 그 어떤 매체도 살아남을 수 없다.

종이와 인터넷 모두를 가지고도 신뢰를 얻지 못한 보수언론의 위기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인터넷 시대에 라디오로 되돌아간 지도자가 그랬듯, 이들은 신뢰회복 대신 방송참여라는 '시장개척'을 위기 타개 방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댓글 읽기는 이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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