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시청자들이 케이블TV 요금을 프리미엄급으로 신청하면 45개의 채널을 이용할 수 있다. 뉴스, 영화, 드라마, 연예오락과 같은 장르의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케이블 선을 타고 시청자들의 안방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문제는 프로그램의 질이다.

하루 종일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려보지만 마땅히 정착할 프로그램을 찾기란 쉽지 않다. 채널이 늘어나고 프로그램이 많아졌지만 골라먹는 재미가 없다. 노골적인 성적 묘사, 과도한 폭력과 낭자한 선혈도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제법 시청률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연애와 불륜을 다룬 프로그램이나 심령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시즌을 거듭하며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심령프로그램의 경우 한자릿 수 올리기 힘든 케이블TV에서 1% 넘는 시청률을 보인다.

▲ olive의 '연애불변의 법칙'(왼), TVN의 '심령솔루션 엑소시스트'(오른)ⓒ홈페이지
그렇더라도 이런 프로그램들이 갖고 있는 위험성마저 묵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 단체는 얼마 전 이 프로그램들을 <나쁜방송프로그램>으로 선정하여 이들 프로그램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졌다.

시청자로서 이들 프로그램이 우려스러운 점은 ‘전대근적 환타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들은 카사노바의 삶을 부러워하고, 여성들은 신데렐라를 꿈꾸고, 또한 사람들이 무속을 의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제 전근대적 환타지를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근대적 환타지 ①남자는 정욕과 바람기, 여자는 인내와 용서가 제일

요즘 20대는 다른 세대와 달리 만남과 이별을 겁내지 않는 세대이다. 연애할 때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헤어질 때는 깔끔하게 감정을 정리하는 현명함을 지녔다고 들었다. 그러나 올리브TV가 제작한 <연애불변의법칙> 시즌 7 ‘나쁜남자’편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 olive의 '연애불변의 법칙'ⓒ홈페이지
이 프로그램은 연인관계에 문제를 느낀 여성이 남친을 제작진에게 의뢰해 남친의 바람기와 성욕을 자극하는 유혹녀나 상황을 설정해 남친의 진심을 확인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이다. 연인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사랑과 신뢰가 약해 보이는 젊은 남녀가 상대의 애정상태를 확인한 뒤 프로그램 말미에 연인관계를 지속할 지를 결정한다.

피의뢰인인 남성들은 바람기가 많고 강한 성욕을 절제 못하거나, 여친을 돈줄로 알며, 손찌검도 하는 ‘나쁜 남자’들이다. 이 남성은 여자 친구가 있어도 다른 여성들과 진한 스킨십을 나누고, 하룻밤의 섹스를 하더라도 여친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면피를 한다. 답답한 노릇은 그런 남친을 여성은 ‘몸은 어떻게 해도 맘은 나에게 있다’, ‘바람은 피워도 내가 일번이면 된다’며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용서한다.

그녀들은 바람기 많은 남친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면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조강지처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상은 자유연애를 시작하고 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할 만큼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여성들 사이에서 전자 회로판처럼 작동하고 있다.

전근대적 환타지 ②이성을 마비시키는 미신 조장

점술, 무속이나 미신은 비합리적인 논리로 혹세무민한다하여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는 근대를 넘어오며 이에 대한 신뢰가 많이 상실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선택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점술이나 미신을 활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tvN의 <엑소시스트>, 코미디TV <고스트 스팟 시즌3>, MBC every1의 <미스터리 X파일>, tvN E-NEWS <특종의 재구성>의 ‘(故) 정다빈’ 편(3/10) 등이 그러한 예인데 과학으로 입증 불가한 초현실적 현상을 소재로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흥미 위주로 제작하였다.

▲ TVN의 '심령솔루션 엑소시스트'ⓒ홈페이지
이 프로그램들은 미혼으로 고인이 된 남녀의 영혼 결혼식, 여성의 생과부살, 고부갈등의 원인은 조상 귀신 등으로 시청자들을 자극하고 있다. 현실-초현실을 혼돈케 하여 현상의 인과관계를 왜곡하게 한다. 또한 양성평등적 관점에서 보면 전근대적인 논리로 여성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강원도 일대에서 발생한 연쇄집단자살사건으로 사회가 도탄에 빠져있을 무렵이다. 한 남성이 인터넷 자살 카페를 통해 자살을 희망하는 미혼 여성들을 여관으로 유인한 뒤 처녀귀신으로 죽으면 영혼이 구천을 떠돈다는 핑계로 이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미신에 덧씌워진 왜곡된 여성상은 다른 범죄의 원인으로 이용된다.

이들 프로그램은 시작화면에 ‘일부 개인의 경험이며 미신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막을 방송하지만 시청자들 사이에 퍼지는 무속이나 미신에 대한 맹신은 가로막을 길이 없다. 이로 인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적 행위 또한 막을 길이 없다.

이처럼 유료방송이 전근대적인 패러다임을 자기 성찰 없이 방송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상식 수준을 19세기로 되돌리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관계의 단절을 낳고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기에 우려스럽다. 따라서 유료방송은 방송의 공적 책임의식을 갖고 질적으로 우수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는 일에 앞장 서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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