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죽산 조봉암 선생의 50주기를 맞아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의 기고를 싣는다. <편집자 주>

50주기 맞아 사법부·행정부의 명예회복 조치 촉구 목소리 높아

오늘(7월 31일)은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이 사법살인(法殺)된 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다.

오전 11시부터 망우리 묘지에서 추모행사가 열리고, 50주기를 앞두고 기념사업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여러 곳에서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30일에는 사회원로들과 여야 정치인 145명이 죽산의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 죽산 조봉암 선생.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죽산의 명예회복을 위한 법원의 재심이 하루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2007년 9월 1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정적인 조봉암 선생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저지른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이라고 결정했으며, 유가족들은 이 결정에 근거해 2008년 8월 19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아직까지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원로들과 정치인들은 “헌정사상 사법살인의 첫 희생자로 꼽히는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이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며 “항일독립운동가면서 건국의 주춧돌을 놓고 평화통일을 지향한 조봉암 선생이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우리 역사는 여전히 온전치 못한 것일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1991년에는 당시 민자당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민주당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 등 여야 정치인 86명이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과 ‘사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국회가 여야 격돌로 파행되면서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정적에 의해 처형되면서도 민주주의 희망 잃지 않은 항일독립 투쟁가

‘역사는 무섭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누구인가? 요새 젊은 세대들은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소중하고 또 소중한 인물이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죽산 조봉암은 이같은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작된 간첩혐의 유죄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이강학 치안국장은 “민심을 자극하고 북을 이롭게 하니 일절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정치적 패자로서 정적에 의해 억울한 살인을 당하면서도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 이처럼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역사가 참으로 무섭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농지개혁 단행한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 부의장

죽산 조봉암은 일제하에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투쟁으로 7년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공산당과 결별한 뒤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여 헌법제정에 기여하고, 대한민국 초대 농림장관, 국회부의장을 거쳐 야당 대통령 후보로 2, 3대 대선에 출마했던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할 때 단행한 농지개혁은 진보진영은 물론 뉴라이트로부터도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6년 진보당 창당 이전에 치러진 2대,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이승만 대통령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1956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504만 표에 조봉암 216만 표(총 유효투표의 30%)였는데, 주로 부정개표로 엄청나게 많은 표가 도둑 맞았다고 요즘까지도 주변에서 가끔 증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프레시안에 기고문을 쓴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의 회고다.

남 전 장관에 따르면,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사전선거운동금지 조항이 생겨난 것은 진보당의 진출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세미나에서 서울대 법대 송석윤 교수는 당시 이기붕과 그 참모들이 급상승하는 진보당을 견제하기 위해 낸 꾀가 사전선거운동금지 조항이었다고 말하였다”고 남 전 장관은 밝혔다. 마치 노동관계법에서 과거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일제 고문 등으로 가운데 세 손가락 첫마디가 없어

▲ 1958년 10월 서울고법 재판정에서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조봉암 선생. ⓒ조선일보
대학시절 죽산 조봉암의 자택을 방문해 선생을 만난 바 있는 남 전 장관은 프레시안에의 투고에서 죽산과 악수할 때 장면을 증언한다. “죽산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준다. 악수 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등을 역임한 주대환씨는 사회민주주의연대(사민련)가 29일 프레스센터에서 연 토론회에서 다소 ‘색다른’ 이유를 들어 우리가 죽산 조봉암 선생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조봉암 선생이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가 역사의 희생자이기 때문도, 사법살인의 피해자이기 때문도 아니고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뒤늦은 명예회복과 ‘정당한 평가’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사실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2대,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얻은 높은 지지와 뒤 이은 진보당의 창당과 부상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이중간첩 혐의을 조작해 ‘정적(政敵)’을 제거한 것이지만, 실제 죽산의 처형을 행동에 옮긴 주역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홍진기 당시 법무장관이다. 일제 때 총독부 판사를 지낸 친일부역자 홍진기 법무장관이 처형 명령에 서명한 다음날 조봉암 선생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아버지다. 연좌제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史實)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4·19혁명 당시 내무장관 홍진기, 발포명령으로 수도권에서만 200여명 사망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인 고 홍진기씨는 조봉암 선생의 법살 주역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법무장관에 이어, 1960년 내무장관이 된 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 당시 시위자들에게 경찰이 발포하도록 명령하여 수도권에서만 200명이 넘는 사망자를 포함한 무수한 사상자를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조중동과 재벌에 방송을 넘기는 신문법과 방송법 등의 불법 날치기 강행의 배후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조중동이 있지만. 이를 직권상정이라는 행동으로 옮긴 이는 김형오 국회의장인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50년 뒤 방송마저 장악하게 된 홍석현과 중앙일보 그룹

다시 반복돼서는 안되는 역사를 두렵게 상상한다.

홍석현 회장과 그 족벌이 소유, 지배하고 있는 중앙일보․보광그룹이 이번 언론악법 강행으로 종합편성채널이나 지상파 방송 등을 장악해 거대한 복합미디어그룹을 완성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중앙일보는 미국 최대의 복합미디어그룹인 타임워너(Time-Warner) 계열사와 합작을 시작했다. 이번 언론악법 강행 통과를 전제로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다.

그래서 무려 100여개가 넘는 주식회사를 가진 중앙일보·보광그룹이 정치권력을 포함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의 거대한 복합미디어그룹으로 무소불위의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정치적 야심을 버린 적이 없는 홍석현 회장이 대통령이 되거나 내각책임제하의 이탈리아의 수상 베를루스코니처럼 되는 것도 상상의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수구세력이란 그토록 뻔뻔하고 집요하니까!

그 때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 ‘홍석현 대통령(?)’은 어떤 역사적 평가를 내릴까?

조중동에 방송을 넘겨주려는 2MB 만세! 딴나라당 만세! 조중동 만세! 홍석현 대통령 만세!

<별첨>

죽산 조봉암 사법살인(法殺)에 관여한 사람들

1. 수괴: 이승만 대통령
2. 행동대장: 홍진기 법무장관(1917. 3.13 - 1986. 7.13); 일본고등문관시험; 법무장관(1953); 내무장관 (1960)
3. (대법원) 상고심 재판장: 김세완(1894-1973); 판검사특별임용시험; 대법관(1953); 국민대 학장(1967)
4. (대법원) 주심판사: 백한성(1899-1972); 사법판사보시험; 내무부장관(1953); 대법관(1955)
5. 변옥주(1906-1958); 일본고등문관시험; 서울고등법원장(1954); 대법관(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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