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내 비박계가 결국 탈당을 결행하기로 했다. 이들은 21일 아침 탈당을 논의하는 회의에 33명이 참석했고 이 중 31명이 탈당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회의 참석자 이외에 탈당 의사를 밝힌 사람까지 합하면 비박계가 규합한 현역 의원은 총 35명에 이른다고 한다. ‘디데이’는 12월 27일이고 주호영 정병국 의원이 신당 창당 등을 위한 공동준비위원장직을 맡는다고 한다.

비박계가 살림을 따로 차리기로 하면서 당분간 정계는 혼돈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이들이 탈당을 결행하기로 한 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진 한국 특파원단과의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발언을 보면 이러한 예감을 해볼 수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 불살라서라도 노력하겠다”고 밝혀 대선출마 의지를 분명히 했다. 또 “정치라는 것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현존하는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대권에 도전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문제는 어느 세력과 무슨 명분으로 손을 잡느냐는 거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기 이전 반기문 사무총장에 대해서는 친박계가 지지하는 후보로 대선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다수였다. 그러나 반기문 사무총장이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우려를 연달아 내놓으면서 그럴 가능성은 점점 더 엷어지고 있다.

이런 정황은 친박계 인사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새누리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보수정치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대권주자는 반기문 사무총장만이 아니라는 주장을 언론에 흘리고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잔류 새누리당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반기문 사무총장 측과 정치행보를 같이 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진 새누리당 정진석 전 원내대표는 탈당 여부에 대해 “무겁게 고민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이전에 반기문 사무총장의 대권행보에 대해 “병든 보수의 메시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결국 반기문 사무총장이 잔류 새누리당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의원 등 비주류 의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회동이 끝난 뒤 기자회견을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군현, 김성태, 유승민 의원, 김무성 전 대표, 황영철, 권성동, 정운천 의원. (연합뉴스)

비박계 입장에서 보면 반기문 사무총장과 최대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분당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다. 총선은 멀었고 대선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이후의 정치일정은 유력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점이 비박계가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탈당 결행 일자를 미뤄온 결정적인 이유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대선불출마를 선언한 상태에서는 대권주자인 유승민 의원이 탈당에 동의해야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승민 의원의 지지율이 여전히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문제이다. 더군다나 잔류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보수층이 유승민 의원을 ‘배신자’로 지칭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는 비박계도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대안’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반기문 사무총장이 가장 적절한 대안이라는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반기문 사무총장과 국민의당 안철수 전 공동대표 간의 연대설도 흘러나온다. 얼마 전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의 대권 도전을 도울 것이라며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대권주자직을 양보할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90세를 넘긴 노정객의 허언으로 치부하기엔 유사한 시나리오를 언급하는 여의도 모사꾼들이 많다.

이들이 반기문 사무총장과 안철수 전 공동대표 간의 연대가 현실화될 수 있는 유력한 재료로 꼽고 있는 것은 ‘개헌’이다. 사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정치적 캐릭터는 분권형 개헌 논의에 최적화돼있다. 외교 등 외치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량을 갖추고 있으나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분권형 개헌에서 외치를 책임지는 대통령의 자리에 반기문 사무총장을 놓고 나서 내치를 관장하는 국무총리 자리에 누구를 놓을 것이냐에 따라 정계개편의 시나리오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반기문-안철수’의 조합이나 ‘반기문-손학규’의 조합도 가능하다. 대선불출마를 선언한 김무성 전 대표나 유승민 의원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최근에는 반기문 사무총장과 같은 충청권 출신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대권 도전에 뜻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이 경우에 대입하자면 ‘외치 반기문-경제 정운찬’이라는 그림도 불가능하진 않다.

최근 개헌을 논의하는 흐름 속에서 2017년 선출되는 대통령의 임기를 제한하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계개편의 시나리오는 더 다양해진다. 다음 총선에 맞추어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고 2020년에 총선과 대선을 같이 치러야 한다는 건데, 이 경우 유력 대권주자들이 2017년 대선은 무난한 후보로 합의하고 ‘진검승부’는 차기로 미루는 합의가 더 유연하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대선 전에 개헌이 되는 게 쉽지 않다는 현실을 적절히 피해갈 수 있다는 것도 이 시나리오의 장점이다. 이 경우 ‘무난한 후보’는 반기문 사무총장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기자회견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어떤 정계개편 시나리오라도 본질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첫째는 어떤 경우든 현재 야권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 대한 ‘포위망’이라는 네거티브 캠페인의 형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일부 언론들은 이 지점을 ‘친박과 친문을 제외한 제3지대 정계개편’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계개편은 가치와 노선이 아닌 권력을 중심에 놓고 벌이는 합종연횡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만일 이러한 정계개편에 가치와 노선의 추구라는 기준으로 이뤄진다면 이는 ‘보수재집권’을 현실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반기문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 시나리오의 두 번째 문제다. 한국의 보수정치는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가장 크고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권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집권 세력이 반드시 그 모든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는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통령이 민주공화정의 가치를 부정하고 헌정을 유린하였다면 이는 얘기가 다르다. 박근혜 정권이 보수세력을 총칼로 위협해 자기가 권력을 쟁취한 게 아니다. 그를 대통령의 자리까지 밀어올린 것은 보수정치 그 자체다. 보수정치는 박근혜 정권이 탄생한 이후에도 그의 충실한 수족을 자처하며 정치 그 자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즉, 한국의 보수정치는 언제든지 민주공화정을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돼버린 거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재집권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기문 사무총장을 이용한 정계개편이나 새누리당 분당 및 탈당 결행을 말하기 이전에 반성과 성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탈당을 결행한다는 사람들이 ‘반성한다’며 친박계를 비난하고 있으나 근원적 차원에서 정치에 대한 관점 자체를 바꾸겠다고 말하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성정치가 과거를 반성하고 관점을 바꾸는 첫 걸음은 반기문 사무총장 및 개헌을 통한 이런 저런 정계개편 시나리오에 목을 매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권력을 잡는 게 아니라 어떤 권력을 만드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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