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때 만들어진 '이해찬 세대'라는 조어는 DJ정부를 건너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집권 기간 내내 멍에처럼 맺혀있던 조롱이었다. 무능력한 세력이 사회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근거하는 설명이었다. 몇 차례의 변용을 거쳐선 아직도 급진적 감수성을 버리지 못한 386들이 귀한 내 아이의 미래를 갉아먹는다는 프로파간다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한 과목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었다. 이해찬 당시 교육부총리의 너무나도 유명한 발언이다. 10년도 더된 발언을 추적하여, 그 앞뒤 맥락에 어떤 문맥들이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이제와 따져보는 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도 선의였을 테다. 애써 교육을 망쳐놓고야 말겠다는 객기가 아니었더라면,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한계 속에서 가장 그럴싸한 해법을 모색했을 테다. 그 일말의 양심마저 부정할 순 없다.

다만, 그의 선의와 양심이 현실의 문제를 개척하는데 적절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98년 이른바 '5.31 교육개혁'의 산물인 '이해찬 세대'는 단순암기식 교육을 창의적이고 다양한 교육으로 바꾸기 위해, 공급자 중심의 정책을 수요자 중심으로 바꾸고, 규제가 아닌 자율과 참여의 원칙으로 교육 정책을 바꾸자는 목표의 추진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말들이고, 또 다시 10년 뒤에 읽더라도 당위적으론 완벽하게 옳을 문장이다.

그런데 실패했다. '5.31 교육 개혁'은 그냥 실패한 수준이 아니라 완벽하게 패배했다. '이해찬 세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상황은 그 조어를 매개로 한 치고 받음이 얼마나 극렬했던 가를 입증한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당시의 강남 학부모, 언젠가 강남으로 이주하려는 꿈을 갖고 있는 학부모(그러니까 거의 전부)들이 악의에 가득 찬 증오를 쏟아 부었다. 그 물어뜯음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이해찬 세대'를 일컬어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라 조롱했다. 수행평가와 학교생활기록부 중시하고 시험 축소 및 모의고사 폐지를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또래 아이들은 학습능력 전반을 의심받기도 했었다. 서울대 교수들 사이에선 신입생들이 미적분을 몰라 수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 이었다.

'이해찬 세대' 그들도 어느덧 20대 중반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가장 치열한 '스펙' 경쟁을 치러낸 첫 세대가 되었고, 본격적인 사회에 진출하기도 전에 '88만원 세대'라는 불행한 호명을 얻은 비운의 또래들이 되었다. '이해찬 세대'는 10년의 사회적 변주를 거치며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들 이미 성공하기 힘든 구조에 갇혀버린 이들이 된 것이다. 그 사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고, 정권이 바뀌었다.

▲ 이명박 대통령(자료 사진) ⓒ 청와대
지난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학들이 내년 입학시험부터 논술 없이 입학 사정을 통해 뽑고, 농어촌 지역 분담을 해서 뽑을 것이고, 이를 통해 임기 말쯤 가면 상당한 대학들이 거의 100%에 가까운 입학 사정을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인수위 시절 이미 예고했던 대로, 입학사정관제의 신속하고 완전한 시행을 천명한 것이다.

그 발언 이후 격화되고 있는 논란을 새삼스레 환기하지는 않겠다. 학부모와 교사,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일제히 반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청와대를 제외한 모든 사회 분야, 세력들이 이토록 일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아니면 오죽해서 나건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왕차관'이라 불리는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이 직접 나서 '속도 조절론'을 표명해, 청와대와 맞서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입학사정관제를 버릴 것이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실행해야 할 최소한의 명분이 있는 한 이명박 대통령은 밀어붙일 것이다. 반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라고 폄훼하고, 비판자를 배제하며 그는 또 뚫고 나갈 것이다. 불행하지만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정부의 통치술이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지극히 우호적인 세력조차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우려하고 심지어 반대하고 있지만 그는 끄떡없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 사업의 본질이 강 살리기를 빙자한 개발 사업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친환경을 표방하고 있되 반드시 환경이 파괴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는 글 역시 차고 넘치지만 그는 꿈적도 않고 있다. 비극이되 이젠 헛웃음만 나오는 붕괴의 시대에 또 하나의 상식이 꺾인들 별로 표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두렵고 헛헛하다. 4대강 사업이 강을 살리는 친환경 사업이라는 그의 논리 구조라면, 입학사정관제가 사교육을 절감하는 교육 개혁이 되는 것은 삽시간일 테다. 대학에게 선발의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서 입시 경쟁의 양상을 한층 치열한 아사리판으로 몰아가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라서 막연할 테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원자재'를 뽑아야 한다며 고교등급제 시행을 주장해 온 대학들이 입학사정관제를 빌미로 어떤 선택을 할런지 역시 너무도 자명하지만 가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을 테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삼불제의 골격이 완전히 붕괴될 기여입학제 허용의 순간 역시 초읽기에 들게 될 것이다. 고교등급제와 본고사 금지의 제도적 강제력이 사라진다면 위태하나마 울타리 안에서 관리되던 입시는 완전한 방목, 정글의 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5.31 교육 개혁'이 '이해찬 세대'라고 하는 괴물을 낳은 이유는 간단하다.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을 도려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대학 서열화를 깨지 않는 한 어떠한 처방도 백약이 무효하다. 어설픈 형태로 입시의 기능을 분산하면, 심화되고 있는 사회의 신자유주의 논리 속에서 경쟁과 배제의 양극화는 불가피하다. 이해찬 세대가 10년도 되지 않아 88만원 세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떠한 형태의 변용이라도 먹어치울 수 있는 사교육의 흡수력 앞에서 입학사정관제는 가장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다. 사교육비 절감과 입학사정관제를 동시에 떠들며 한 치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불감적 무식 앞에서, 이해찬 교육부총리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쟁과 자유를 신봉하는 이명박 시대에 놓여 진 세대들이 그저 가여울 뿐이다.

먼저 교실을 빠져 나온 자의 윤리적 책무를 분명 해야 할 텐데, 막막하다. 요새도 면접 때 아버지 직업을 묻고, 서울 와서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면 호텔이라고 대답해야 한다던데 그저 수치심과 측은지심이 교차할 뿐이다. 약소하나마, 나도 그 시절에 고생 할 만큼 했다고 떠드는 '꼰대'가 되진 않겠다는 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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