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은 분당의 길로 한 발자국 씩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속도가 너무 더뎌 언제 멈춰설지 모르는 상황이다. 친박계인 정우택 의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되면서 분당 ‘초읽기’가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왔으나 여전히 비박계 내부의 의견분포를 보면 탈당을 감행하자는 인사가 30% 정도 밖에 안 되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교착 상태는 지난 18일 보도자료를 통해 알려진 유승민 의원의 입장에 따라 변화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유승민 의원은 전권을 가지는 것을 전제로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19일 중앙일보의 보도를 보면 유승민 의원은 “이번 주가 분당의 고비다. 하지만 주류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란 큰 기대를 갖고 있진 않다”, “친박 핵심들이 얘기하는 2선 후퇴는 말이 안 된다. 지금까지도 2선에서, 뒤에서 다 해놓고…”라는 등의 발언을 내놓고 있다.

유승민 의원의 예상대로 친박계가 ‘유승민 전권 비대위원장’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친박계가 ‘촛불 민심’을 거스르며 벌인 지금까지의 모든 소동이 바로 그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발언을 보면 유승민 의원은 강경파 인사들을 비대위원에 임명하고 친박계 핵심인사에 대한 ‘인적청산’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인적청산은 친박계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마지노선 너머의 문제이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새 원내대표로 정우택 의원이 선출된 뒤 회의장을 나서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당연히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비박계도 그간 요구 수위를 낮춰왔다. 애초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처리 직후 비박계는 ‘최순실의 남자들’, ‘친박 8적’ 등을 거론하며 이들에게 당을 떠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사실상 정계은퇴 또는 탈당을 요구한 것이다. 친박계는 격앙되었다. “책임을 지라면 질 수 있지만 왜 인적청산을 요구하느냐”란 항변이 분출됐다. “김무성, 유승민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진석 원내대표가 사퇴하자 비박계는 슬그머니 요구 수준을 낮췄다. 지난 13일 CBS라디오와의 전화 연결에서 비박계 인사로 최고위원을 지낸 강석호 의원은 탈당을 요구하는 것인지 2선후퇴를 요구하는 것인지의 질문에 “우리가 2선 후퇴로 가겠다,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애초의 ‘당을 나가달라’는 요구와 비교하면 명백한 후퇴이다.

친박계인 조원진 의원은 다음 날인 14일 중립적 원내대표가 당선되는 것을 전제로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친박계 핵심 인사에 대한 2선후퇴도 요청하겠다고 발언했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비대위원장 선임 문제에 대해 비박계가 추천한 인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비박과 친박이 이후 국면에 대한 대략의 의견조율을 진행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결국 이런 관점으로 보면 ‘친박계 2선후퇴, 비박계 비대위원장 선임’이 친박과 비박의 합의안(?)이다. 그런데 유승민 의원의 발언은 이를 뒤집는 것이다. 비대위 구성 문제는 그렇다 쳐도 “친박계 2선후퇴는 말이 안 된다”고 발언한 것은 지금까지의 교감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이를 ‘탈당 명분쌓기’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비박계의 입장에서 집단 탈당은 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규모의 문제이다. 20명 이상의 의원들을 규합해 원내교섭단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김무성 의원이 신당창당론을 언론에 흘리고도 탈당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혼자 또는 단 몇 명이 이탈해봐야 큰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정우택 원내대표의 당선으로 ‘도로친박당’이라는 지적이 쏟아지는 판국에도 탈당을 입에 올리는 비박계 의원은 사실상 없다. 비박계 이혜훈 의원은 지난 16일 CBS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았다고 모두가 판단할 때까지 우리는 사력을 다할 것”이라면서 “원내대표는 그중 하나의 분수령일 뿐 이게 마지막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이런 기류는 19일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걸로 보인다. 이날 CBS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정병국 의원은 비대위원장 관련 협의가 자신들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 대해 “탈당이 아니고 새 나무를 심어야 한다”면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병국 의원은 지난 14일에도 원내대표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당 내에서 비박계 원내지도부를 따로 꾸리겠다는 비상식적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탈당을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승민 의원의 ‘입장’이 과연 흔들리는 비박계를 집단탈당이라는 하나의 전선에 재배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비박계의 두 축인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의원이 탈당을 선택하면 상당한 파장이 불가피하겠지만, 앞서 봤듯이 비박계 의원 다수가 이를 지지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 두 사람이 탈당을 선언할 수 없는 관계가 성립돼있기 때문이다. 관점을 바꾸면 오히려 유승민 의원의 입장 발표는 비대위원장이라는 ‘독배’로부터 도피한 걸로도 볼 수 있다.

유승민 의원은 앞서 중앙일보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이런 입장을 발표한 이유에 대해 “당 개혁을 바라는 의원들은 ‘내가 맡아야 한다’고 하고 반대편은 ‘유승민은 죽어도 안 된다’, 중간에선 친박·비박 공동위원장이니 이상한 소리들을 하면서 혼란이 심해 분명히 입장정리를 해야겠다고 해서 선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하자면 ‘비대위원장을 시키려면 (친박계 인적청산을 위한) 전권을 주고, 아니면 나에게 말하지 말라’는 거다. 앞서 설명했듯 친박계가 이 요구를 받아 들일리 만무하다. 비박계는 당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남는 것은 비대위원장 논의에서 유승민 의원을 제외하는 것 뿐이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어 비대위원장 인선과 이에 대한 유승민 의원의 입장에 대해 “많은 의견을 수렴해야겠지만 일단 비대위원장에게 비교적 전권을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면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사람은 곤란하다”고 했다. ‘전권 비대위원장’은 가능하지만 이 사람이 친박계 인적청산을 주장해서는 안 되고, 그런 의미에서 ‘유승민 비대위원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먼저 새누리당을 떠난 탈당파들은 당에 남아있는 비박계를 향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김용태 의원은 18일 유승민 의원에게 ‘공개편지’를 띄워 “더 이상 어떤 수모를 당해야 친박들과 결별할 것인가”라며 “아수라장이 된 새누리당을 떠나라”고 주장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 역시 “비박계는 초심으로 돌아가 달라. 정치적 계산을 그만두라”면서 “친박이 주류이고 다수인 새누리당 안에서 새누리당 해체와 인적 청산은 애당초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보수언론은 당 내에 남아있는 비박계가 탈당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웰빙 비박’이라는 말까지 동원하고 있다. 비박계가 당 내에 남아 ‘해체에 준하는 재창당’을 관철시키더라도 도대체 무엇이 바뀌는 거냐는 물음에 대해 언제까지 답을 아낄 것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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