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집회·시위와 관련한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짚는 보고서 프로젝트를 맡아 일주일 넘게 씨름을 했다. 내 호기심은 타임머신을 타고 1919년으로 날아갔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집회·시위를 당시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을지 궁금했다. 이완용은 그해 3월8일자 <매일신보>에 쓴 글 ‘황당한 유언(流言)에 미혹치 말라’에서 조선의 독립 가능성은 없으니 선동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4·19혁명, 6·3사태,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이 된 주요 집회·시위 사건 보도를 뒤좇아가봤다. 2003년 미선·효순 촛불집회와 2004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2009년 촛불집회 보도도 일일이 확인해봤다. 내 가설은 90년 동안 주요 언론의 집회·시위 관련 보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막상 내 가설이 너무 정확히 맞아떨어지자 끔찍했다.

언론은 매 사건에서마다 크게 ‘안보 프레임’과 ‘국가경제·발전 프레임’을 선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보 프레임’은 분단체제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요구를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틀 지웠다. ‘국가경제·발전 프레임’은 최근까지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에서 예외 없이 나타났다. 두 프레임은 병렬적으로 또는 혼용되어 활용되기도 했다. 최근 촛불집회에서도 이들 프레임이 여러 층위와 방면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었다.

언론들이 노골적인 사실 왜곡과 함께 그 정당성을 철저히 부인했던 집회·시위가 훗날 ‘혁명’ ‘민주화운동’ 등으로 역사적 재평가를 받더라도, 언론들은 자신의 과거 보도에 대해 재평가하거나 수정하는 일도, 이들 집회·시위를 사후적으로 ‘승인’하는 절차도 없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언론이 재현한 집회·시위는 매번 보도 내용과 진실이 다른 것으로 훗날 드러났지만, 보도 행태는 고장난 녹음기처럼 끝없이 되풀이됐다.

언론은 국가기구가 아니다. 그러나 국가가 내린 합법·불법 판단의 연장(延長) 위에서 집회·시위가 미칠 손실의 총량에만 관심을 뒀을 뿐, 집회·시위 참가자들이 어떤 이유로 선량한 시민에서 하루아침에 ‘난동자’ ‘폭도’가 되는지 살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회·시위는 대중의 무지와 이를 악용하려는 세력의 선동, 여기에 따른 대중의 부화뇌동의 결과로 일어난 소요 사태일 뿐이었다. 이래서야 제4부 권력이라는 자타의 평가가 설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문제는 이런 저널리즘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아주 오래된 유물을 아침마다 새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저널리즘의 미래를 논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49호(2009-07-27)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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