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늘상 그러하듯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것들, 그러나 그 소소함이 모여 사람사이의 삶의 기운을 만들고, 그 에너지가 우주의 기운을 충전시켜 작은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 그 믿음을 무기삼아 대한민국 평범한 ‘서민’으로서의 삶을 근근히 지탱해나가는 중이다. 쉽게 말하면 본연에 충실하는 것.

▲ 7월 21일 녹음하던 날ⓒ김사은PD
올해 방송 사업 목표가운데 하나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낭송 CD 제작 작업이 시작되었다. 6월27일자에 게재한 <시각장애인 승렬씨의 하루>에서도 소개했듯이, 전북 진안에 거주하는 시각장애인 유승렬씨의 방송 참여를 계기로 전주에서 활동하는 시인 <풍물시동인>, 전북원음방송이 함께 하는 일이다.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싶다는 승렬씨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풍물시동인 회장인 조미애 시인이 적극 나서 동인지 회원 23명이 자작시를 낭송한 CD를 제작하게 된다. 이번 CD 작업에 참여한 풍물시동인은 모두 23명. 소재호, 진동규, 우미자, 최영, 조미애, 조기호, 신해식, 김영, 김남곤, 심옥남, 심의표, 박은주, 박영택, 최만산, 정군수, 유인실, 조정희, 문금옥, 정희수, 장교철, 이동희, 박철영, 장욱 시인 등이 참여하고 있다. 시낭송 CD는 풍물시동인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그 첫 작업으로 지난 21일 풍물시동인 회원가운데 최영, 조미애, 정군수, 조정희, 이동희 시인 등 다섯 명의 시인이 방송국을 방문했다.

중견 시인들이지만 이번 만큼은 낭송 작업에 임하는 자세가 새롭다. 여러 번의 연습 후에도 막상 <ON- AIR> 상태에서는 NG가 잦다. 그만큼 긴장한다는 뜻. 분위기가 무르익고 음악에 취해, 시에 취해 녹음 속도가 빨라졌다. 그날 분량의 시 녹음을 마쳤을 때는 녹음 시간에 비해 나도 엔지니어도 기진맥진한 상태. 한 마디, 한 구절, 한 연, 한 작품마다 마다 시인들과 같이 호흡하다보니 마무리할 즈음에는 큐 사인할 때 마다 팔이 덜덜 떨린다. 이 작품 하나 하나에 시인과 시각장애인이 영혼을 교감하며 소통한다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작업이다. 마음이 전해져야 한다.

미리 전달받은 시 작품 모두 감동적이었는데 특히 이날 녹음한 시 가운데 조정희 시인의 <소아마비에 관한 명상>에 마음이 간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건네진다.

소아마비에 관한 명상
-조정희-

절룩이는 것도 때론
아름다울 수 있지
음악 속에선
당김음(音)주법으로 절룩이는 음표가 있어
쇼팽도, 라흐마니노프도.
베토벤도 싱코페이션(당김음)으로 아름다운 曲들을 작곡하여
가쁨과 슬픔을 노래하게 하였지

버림 받은 것이 아니고
상처도 아니고
상처 안에 숨어 있는 골목도 결코아닌

내 삶과 육체 속에 살아
죽을 때 까지 함께 할
지독한 아름다움이지

조정희 시인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어떤 시작(詩作) 활동보다 의미있는 작업이었다며 살풋 홍조를 띈 볼을 감쌌다. 아름다웠다.

▲ 풍물시동인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영, 이동희, 정군수, 조정희, 조미애ⓒ김사은 PD
현 전북일보 사장인 김남곤시인의 <묵은 수첩>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서 감히 내 목소리를 넣어보겠다고 욕심을 부렸더니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대신 낭송했다.


묵은 수첩

-김남곤-

나는 아직도 지우지 않고 있네
차마 먹줄을 죽 그어
그대 모습 지울 수가 없다네
펼치기만 하면
그 순간 화들짝
내 눈썹 끝에 매달려
이슬로 젖어드는 그대
그대는 새파랗게 웃고 있구나
그대는 새파랗게 울고 있구나
그렇게 울고 웃는 그대와
이승을 한 치도 헐지 않고 동행하면서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를 먹줄로
죽 긋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 생각조차도
먹줄로 죽 그을 수가 없다네

풍물시동인 조미애 회장은 “시를 매개로 한 사랑의 행위들이 시각장애인과 우리의 가슴을 열게 하고, 안보이지만 보게 하고 사랑하게 할 것”이라며 “우리 사회에서 감동으로 흘러가 나라를 아름답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인과 시인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시각 장애인을 위한 시 녹음집 만들기가 오래 가도록 노력하겠다”며 풍물시동인 23명의 작은 사랑의 마음이 시각 장애인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낭송 CD는 7월과 8월 한달 동안 더 작업을 거쳐야할 것 같다. 앞으로도 몇 차례 녹음과 편집을 반복해야 할 일이지만 첫 작업이 순조롭고 행복했으므로 이어지는 작업도 기대가 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낭송 녹음CD 제작인데 왜 내가, 미리 행복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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