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대로 미디어법안이 결국 날치기 처리됐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7월22일 국회에서는 이른바 '조중동-재벌방송'을 만들기 위한 일사분란한 작전, 이 펼쳐졌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뭔가 매끄럽지 못하다. 그만큼 반대여론이 두렵고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발이 거셌던 건지, 원체 여당의 조직력이나 기획력, 상황대처능력이 그것밖에는 안됐던 건지 영 어설프기 그지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사사오입 개헌에 맞먹는다는 ‘재투표 가결’이 있었고,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라도 발각되면 무효처리가 마땅할 ‘대리투표’가 있었다. 아무리 국회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고는 해도, 이건 좀 곤란하지 싶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이는 법안마다 날치기가 횡행했고, 말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곳이라지만 방송을 통해 본 미디어법 처리 장면은 헛웃음이 나올 만큼 꼴사나웠다. 부끄럽고 서글펐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까지 움직이게 하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상한 아집이다. 국민의 70%가 반대한다는데 온갖 무리수를 두고 절차적 정당성까지 무시하며 밀어붙이는 게 어떤 의미인걸까.

민망한 처리과정이 스스로 켕기는 법안임을 강력하게 증명하고 있지만, 미디어법의 ‘떳떳하지 못함’은 여러 차례 확인된 바다. 이미 KISDI 연구의 통계조작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나경원 의원 같은 경우 미디어법과 관련한 여론조사를 반대하며 ‘국민들이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 이하의 말을 말이라고 내뱉은 바 있다. 실제로 법안의 내용은 법안이 통과되기 이전에 한나라당 의원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한다. 미디어법이 통과되는 순간의 방송영상을 보면 ‘찬성하면 되는거야?’, ‘이번 거는 찬성이야?’ 등등의 말이 떠돈다.

▲ 22일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해 표결처리하는 모습. ⓒ안현우
"이는 미디어산업 선진화, 질 좋은 일자리 창출, 전세계 미디어시장 내 경쟁력 확보 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국민들도 이해할 것"

미디어법이 통과된 이후 청와대 관계자가 한 말이다. 그랬다. 언제나 그들에겐 ‘불가피한 선택’들이었다. 생각해보면, 저들은 쉼 없이 '커밍아웃'을 감행해 왔다. 참으로 대담하리만치 뚜렷하고도 거침없는 행보였다. 물론, 계속되는 커밍아웃 이후에도 이제껏 입에 담아온 관성을 어쩌지 못하고 ‘친서민’, ‘중도실용’ 등의 공허한 수사를 끊어내지 못하는 분열증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만 알아주자. 이 일련의 행동이 이들의 ‘신념’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미디어를 보수언론과 재벌에 양도하는 것을 통해 재집권을 도모하는 것, 재벌이 은행경영도 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불에 태워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가난한 이들이 ‘강짜’를 부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절반 이상의 국민이 비정규직이 되어 해고의 위협과 부당한 차별에 신음할지라도 노동유연성을 확대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것, '세금폭탄'에 신음하는 부자들의 고통을 낮추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면서도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예산은 가차없이 삭감하는 것, 기업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국민들의 건강과 생업도 삶의 질과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 대체 아직도 부족하다면 끝없이 늘어서는 커밍아웃 리스트들이 쑥스럽지 않겠는가.

사실 이 정도의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조건은 어디에서 오는가. 보수언론, 재벌과의 유착이 매우 강력한 수준의 이해관계로 얽혀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노무현의 저 유명한 말(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을 다시 되씹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들은 ‘시장의 대리인’임을 주구장창 주장하고 있다(이날 함께 통과된 금융지주회사법을 보라). 국민의 대표자니, 민의의 대변자라는 말이 이젠 차라리 외설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역풍에 대한 고려가 없었을까? 그 정도 판단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도 뒤집기가 가능하다는 생각일거란 말이다. 70% 반대? 그 정도는 가뿐하게 ‘아웃 오브 안중’이 가능한 수치다. 작년 '쇠고기 정국' 당시 반대여론이 얼마나 됐더라? 더군다나 ‘광우병 사태를 만들어낸’ 근본원인, ‘왜곡방송’ 접수를 위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터에 그 정도를 겁낼 이유가 없다.

이번 정국은 여러 집단들에게 커밍아웃의 기회를 다시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미디어법 저지를 위해 가장 날카로운 각을 세워 온 것은 물론, 언론종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었지만 형식적으로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것은 제1야당,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무려 ‘총사퇴’ 카드를 들고 나왔다. 만약 실현된다면 정국반전을 위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의원들이 총사퇴를 할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벌써부터 의원총회에서 ‘총사퇴 불사’로, 그러니까 ‘할 수도 있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원내에서 할 일은 해야 한다, 라는 현실론 한 마디면 결코 총사퇴 따위 현실화되지 않는다. ‘생즉사, 사즉생’의 결기 따위 지금 민주당엔 기대하기 어렵다. 한나라당이 보여준 어설픈 조직력을 한 차원 넘어서는 너덜너덜한 시스템으로는 최상급 수사만 남발하다 결국 엉거주춤한 자세로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할 공산이 큰 것이 ‘현실’ 아닌가? 역시 작년 촛불정국에서 민주당이 보여준 어정쩡한 스탠스가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민주당이 다시 온 커밍아웃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지켜봐야 할 이유다.

사실, 커밍아웃의 선택지는 우리들 앞에도 놓여있다. 민주주의의 후퇴가 삶을 옥죄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이든 시민이든 민중이든, 민(民)의 자각과 행동이 절실하다. 막연한 분노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저들의 기고만장과 안하무인을 동반한 패악질이 대중의 욕망에서부터 그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그 욕망을 부추기고 부풀리는 세력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 '민의의 대변자'라는 외설을 걷어내기 위해 끼워야 할 첫 번째 단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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