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광화문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한바탕 축제의 장이 열렸다. 아직 미완이지만 위대한 승리를 거둔 우리 국민은 스스로 축하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국민들은 더 큰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은 듯하다. 구체제의 완전한 청산과 신체제의 건설이다.

청산과 건설에 선후가 있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대선 주자는 관심과 역량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청산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그 청산이 박근혜 정권의 부역자 몇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니까. 그러나 구체제의 청산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박정희 이래 착근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자독식의 가치관, 부패와 불평등의 숙주인 재벌중심의 경제체제,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치시스템, 구체제의 주류로서 대부분의 부와 권력을 독점해온 기득권 세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청산해야 할 대상은 전방위적이다. 절대로 짧게 끝날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완수할 때까지 건설을 뒤로 미룰 수 없다. 불가피하게 청산과 건설은 함께 가야 한다.

개헌이 신체제 건설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인 것은 틀림이 없다. 헌법이란 국가를 운영하는 기본시스템이다. 우리가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의 방향을 잡으면 결국 헌법을 그 방향에 맞춰 고쳐야 한다. 국민주권을 강화하고, 시민적 기본권을 확대하고, 권력을 분산하고, 경제적으로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 헌법으로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권력분산이나 기본권 확대 같은 것은 헌법을 반드시 고쳐야 가능한 것이고, 나머지도 헌법에 기본지향으로 반영하는 것이 변화를 지속적으로 추동하는 데 효과적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연합뉴스 자료사진]

개헌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탄핵가결 전에는 반대 의견의 수준을 넘어 마녀사냥에 가까웠다. 개헌논의를 탄핵을 방해하려는 음모 정도로 취급했다. 그만큼 탄핵가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논의 자체를 막는 것은 민주사회의 기본원리에 어긋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때 문재인 전의원도 '사람이 문제지 헌법이 무슨 죄냐'고 하면서 개헌논의 자체를 원천 차단한 적이 있다. 곧 이어 다음 대선에서 개헌에 대한 입장을 공약으로 제시한 후 차기정부에서 개헌하면 된다는 입장으로 바뀌긴 했지만 지지율 1위 대선주자의 인식치고는 조금 실망스럽다.

개헌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진 배경을 보면 극심한 반대의 원인을 이해할 구석이 없지는 않다. 당초 박근혜 씨가 정국주도권을 쥘 요량으로 개헌을 제안한 데다가 대통령과 동반몰락을 피하고 싶은 김무성 의원 등의 비박계가 개헌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개헌을 하려면 여러 정파가 힘을 합해야 한다. 따라서 김무성 의원의 발언은 개헌을 바라는 정파들이 제3지대로 모여 반문재인 연합을 결성하고,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내각제로 개헌을 한 후 권력을 분점해 살아남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졌다. 놀라운 상상력이다. 따져보면 비박계와 국민의당, 민주당 내 비문계가 모두 손을 잡아도 친박과 친문이 반대하면 개헌은 불가능하다. 국민의당이 개헌에 얼마나 열성적인지 몰라도 친박계까지 포함한 전체 새누리당과 개헌을 고리고 연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국민의당 몰락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의원이 원천봉쇄에서 '대선공약 제시 후 차기정부 개헌'으로 입장을 바꾼 후 개헌에 대한 중요한 입장 차이는 시기다. 대선 전과 대선 후다. 만약 대선 후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탄핵안이 가결된 지금 바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약간 무의미한 차이다. 불확실한 정치일정 때문이다.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되면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 문제는 헌재의 인용시기를 지금은 알 수 없다는데 있다. 헌재에게 주어진 시간이 180일이므로 1월 말부터 6월초 사이가 모두 가능하다. 1월이라면 대선전 개헌이 시간상 불가능하다. 6월초라면 시간은 충분하다. 따라서 일단 개헌논의를 시작해 추진하다가 개헌을 매듭짓지 못했는데 탄핵소추가 인용되면 불가피하게 대선 공약으로 넘기고 차기정부에서 개헌을 하면 된다. 헌재의 인용시기를 예단해 시간이 없어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없다.

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국가변혁을 위한 개헌추진회의에서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헌이 박근혜 정권 부역세력들의 정치생명 연장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쉽게 해소할 수 있다. 개헌을 정치권이 주도하지 말고 국민추진체에 맡기면 된다. 아이슬란드에 선례가 있다. 마치 배심원을 뽑듯이 나이와 성 기타 소속 집단을 고루 안배해 사람들을 뽑고, NGO와 전문가 그룹에서 일부를 참여시켜 이른바 '시민의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들이 개헌안을 만들고 국회는 이를 받아 정식으로 발의해 통과시키고,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절차를 따르면 몇 가지 이점이 생긴다. 첫째, 개헌의 추진여부부터 권력구조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이 유불리를 계산해 개헌안에 개입할 여지가 줄어든다. 둘째, 국회가 주도하는 것보다 광장여론을 수렴하는 데도 훨씬 유리하다. 국회는 국민추진기구가 법적 권한을 갖도록 그 구성 및 운영에 대해서 특별법을 제정하면 된다.

구체제의 청산과 신체제의 건설은 동전의 양면이다.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신체제 건설의 중요한 일부인 개헌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번지수가 틀렸다. 특히 그게 누구건 개헌논의 자체를 막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며, 자신들이 신체제 건설보다 차기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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