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 6개월. 또 한 사람이 갔다. 이번에는 평생의 반려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노동자의 아내. 남편의 넥타이에 목을 맸다. 죽은 아내를 두고 그가 오열했다.

용산의 철거민들도 그랬다. 가족을 위해 망루에 올랐으며 그 망루에서 천 도의 열기에 질식하고, 새카맣게 타 죽었다. 가족들이 오열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였다. 가해자는 MB 정권의 공권력이고 피해자는 철거민들이었다. 온 국민이 그것을 생생한 화면으로 목격했다.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이 분명한 관계가 역전된다. 알리바이는 권력이 독점했으며, 인민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다. 심지어 고인의 아들이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 왜 그런가? 바로 삶의 정치가 죽고, 그 시신 위로 죽음의 정치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의 피를 먹고 살이 찐 권력은 필연적으로 삶의 정치가 아니라 죽음의 정치에 기생한다.

▲ 4월 29일 용산참사가 발생했던 남일당 건물 옆에서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다.ⓒ나난
인민을 살리는 삶의 정치는 죽은 화폐나 토지, 건물보다 사람과 노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복지요 환경이고 삶의 질이다. 우리는 이 정치를 민주주의로도 코뮤니즘으로도 부른다. 하나의 이념으로서 민주주의의 심화가 코뮤니즘이 되고, 물질적 기반을 갖춘 코뮤니즘이 다중의 일상 안으로 정치화되어 대의체제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이 둘은 삶의 정치를 위해 서로를 추동하고 자극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정치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건강한 정치 활동이 하루아침에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용산의 고인들은 이 삶의 정치를 권력에게 요구하다가 죽어갔다. 따라서 용산은 그러한 삶의 정치가 살해되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권력은 사람보다, 복지보다, 그리고 삶의 질보다 토지와 건물과 화폐에 더욱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죽음의 정치는 산노동의 활력이 아니라 죽어 결정화된(crystalized) 노동에 기반을 둔다. 나아가 그것은 산노동을 죽은 노동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시켜야 살아 갈 수 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권력은 자본의 편으로 넘어” 갔다고. 그런데 자본은 피가 돌지 않는다. 피가 돌아야 할 곳에 화폐가 순환하고, 기쁨을 생산해야할 공동체 대신에 먹고 먹히는 살벌한 규율이 들어선다. 죽은 대통령이 말한 그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자본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가장 어두운 본성이 백주대낮에 곤봉으로 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사회구성체를 지칭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기획에 어긋나는 일체의 사회기반을 철거하고 게토화하면서, 합의나 절차보다 일방성과 공권력에 더 의존한다. 신자유주의의 반인간적이고 친화폐적인 요구 자체가 합의나 절차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의 자유는 국가 공권력의 일상화와 확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용산은 신자유주의 막차에 올라탄 MB 정권이 삶의 터전이 있던 곳에 화폐의 마천루를 짓기 위해 벌인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그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인 토건세력이 후미에 있었고 포위대형의 선두에 경찰이 배치되었으며, 참모막사에 검찰이 앉아 있었다. 살해가 끝나고 검찰은 계획대로 경찰에 면죄부를 주었고, 오열하는 가족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용병(역)들을 현장에 보내고 있다.

그리고 수사기록 3000쪽. 마땅히 공개해야할 정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하긴 근본은 거기 있지 않다. 수사기록은 법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일 뿐. 윤리적으로 우리는 용산 학살의 범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김석기 그리고 MB, 또한 이 명령체계의 골간을 이루는 자들. 그들은 아직 사과 한 마디 없다.

저들은 이 모든 것이 ‘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한다. 맞는 말이다. 법은 권력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들은 제대로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법치는 알아서 기라는 권력의 신호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짓밟힐 것이라는 협박이고, 감히 도전했다가는 바위에서 밀어 버리거나, 태워 죽이겠다는 구체적이고 명증한 명령이다. 카프카가 파시즘을 예견하면서 말했듯이 법이란 권력과 관료체계에 의해 인민의 몸에 인두질되는 폭력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그 본질을 저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법치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우리가 이해 못할 짓들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다.

또 하나 더 있다. 6개월 동안 저들은 ‘버텼다.’ 신영철이 대법관 자리에서 버티고 있듯이 말이다. 이 질긴 버티기에는 분명 철석같은 신념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분명 ‘대중은 무지하며 망각에 능하다’는 히틀러의 말을 믿고 있을 것이다. 노무현 서거, 미디어법 공방으로 이어지는 정세 속에 묻어가다 보면, 대중이 용산을 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영철은 벌써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MB는 신영철 케이스를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목숨들을 태워 죽인 희대의 권력을 매일매일 뉴스로 대하면서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잊을 것인가? 사실 권력은 이것이 두렵다. 마주 대하기 싫은 진실 말이다. 그러니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 노래소리를 들으며 반성했다는 말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아예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밖에.

그래서 그랬나보다. 이문동 가게에서 상인의 호소를 귓등으로 들으며 ‘뻥튀기나 사먹으라’고 부하들에게 고함친 것이 말이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자 하고, 듣기 싫은 소리는 피해가려는 이 ‘증상’은 참으로 구제불능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돌아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5명의 원혼의 한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동정이나 애도를 바랄 것인가? 어림없다. 이 권력은 이제 어떤 죽음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서거를 대하는 태도를 보라. 그리고 몇 일 전, 이 공권력은 반성은커녕 용산 망루와 똑같이 생긴 망루를 다시 세우고 진압훈련을 했다.

죽음의 정치를 구사하는 권력은 흉기를 휘두르는 살인자와 마찬가지다. 폭력과 거짓으로 쌓아올린 권력은 수명이 길지 않다. 지하벙커 안에서 스스로 독약을 마시거나, 측근에게 암살 당하거나, 혁명이 그를 단두대로 이끌었다.

오늘도 용산 현장에서 미사가 진행되었다. 경찰은 유족들에게 ‘불법’집회를 그만두라고 했다. 5 살배기 아이가 들고 가는 촛불도 불법이라고 했던 저들이다. 이해한다. 측은하다. 겁에 질린 공권력. 스스로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그 법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모든 압제자들, 그 죽음의 정치가들은 법을 말했고, 그 법으로 권력을 집행했다. 그러니 그 법이 ‘평등’을 구현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법은 평등하지 않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을 희롱하며, 죽음의 정치는 천칭의 오른쪽에 인민의 시체를 얻어 놓고 자신의 위력을 가늠한다.

자신의 허약함을 감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인민의 피를 전시하는 저들의 위악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덤을 팔 것이다. 죽음의 정치는 그렇다. 죽음 앞에 권력 자신이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산이야말로 저들의 무덤자리이며 가까운 어느 날 거기서 똑같이 죽어갈 것이다. 그게 우리의 법이다. 불법집회를 그만두라고? 살인과 복수를 당장 그만두라!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요한계시록 13:10)

철학으로 세상 읽기

모든 생명의 역동성이 자본에 의해 상품화되고 물신화되며 영혼 없는 죽은 생명들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시대의 혼’이자 ‘시대 모순의 반역’일 수밖에 없는 철학적 실천을 꿈꾸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창립 정신을 받아 우리는 이 시대에 철학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시대는 철학적 사유와 성찰, 탐색을 필요로 한다. ‘철학으로 세상 읽기’는 생명의 역동적 힘을 지배의 힘으로 바꾸어 놓으며 지배와 억압, 착취와 굴종을 낳는 이 세상을 철학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생명의 본래적인 힘과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협력적 지성의 밑알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된 철학적인 시대 평론이다.

김원열(한양사이버대) 문성원(부산대) 박준영(한철연 회원) 박지용(동덕여대) 이병수(경남대) 이순웅(숭실대) 이정은(연세대) 전호근(민족의학연구소) 구태환(상지대) 우기동(경희대) 김광호(한철연 회원) 조경란(성공회대) 송석현(방송대) 박종성(건국대) 박영균(서울시립대) 등이 연재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홈페이지 http://www.hanph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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