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정국의 역동성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빼째라’ 초식도,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나약한 ‘뒷북치기’와 ‘눈치보기’도 거대한 물길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 오롯한 주인공은 수백만 시민들의 상식적인 분노와 행동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국정 농단 세력의 ‘허술함’과 불협화음, 일부 농단 세력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 빚어낸 ‘고백’, 무력감 속에서도 꼼꼼히 적어내려 간 농단에 대한 사초들이 주인공을 거들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가 현실화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이 아니라 총선을 앞두고 있었더라면 저 놈의 국회가 저런 행태를 보였겠느냐?’는 한 시민의 울분 섞인 통찰도 추억으로 남을 만큼 말이다. 찰나에 포착된 진실은 명료하다. 프랑코 군사쿠데타에 맞서 싸우다 ‘쓰러지는 병사’를 담은 로버트 카파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공화국의 가치는 수백편의 논문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소나기는 피해보자는 심사에서 나온 것이든, 떠밀려 하는 것이든, 탄핵소추 찬성의 순간은 진실이다. 탄핵 찬성을 위한 비박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에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진실의 순간을 기쁘게 즐기기에 시민들의 자격은 충분하다. 갈 길이 멀다고 즐길 때가 아니라고 할 일이 아니다. 즐김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쉼과 휴식이기 때문이다. 산에 들어 한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를 기다린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진 백두대간의 마루금에는 수없는 고개가 있다. 힘겹게 오르내리는 사이마다 고개는 어김없이 우리를 쉼터로서 맞는다.

헌법재판소(연합뉴스)

고개는 다시 진실의 순간을 맞으러 떠나라는 무언의 이정표다. 우리가 넘어야 할 또 하나의 봉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 심판이다. 헌법재판소장은 내년 1월 임기가 끝나고, 또 다른 재판관은 내년 2월 임기가 끝날 예정이다. 탄핵소추안을 심의하려면 헌법재판관 9명 중 7명은 있어야 한다. 헌법재판관들이 며칠 밤을 새는 강행군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1월 안에, 늦어도 2월 안에 탄핵소추안을 의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물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헌재가 차일피일 심의를 미루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하지만 온 시민이 주인공으로 참여하며 이끌어온 이 물길의 방향을 헌재가 거꾸로 돌리기란 어렵다. 대통령의 헌법 위반 11개 혐의의 일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경제가 어려운데 기업가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없다는 속내에서 뇌물죄에 눈감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모두에 대해 면죄부를 주기에는 헌법재판관들의 헌법적 상식이 허용하지 않는다.

이미 단초가 있기도 하다. 얼마 전 상시 종사자 5인 미만의 법인이 운영하는 인터넷신문은 신문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개입 의혹이 짙은 신문법 개정안에 대해 헌재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디지털 환경에서 자연인 1인은 얼마든지 사실에 근거해 인터넷에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5인 미만이라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 헌재는 눈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물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 피치자와 통치자가 같아야 한다는 원리, 주권자인 국민은 통치자이자 피치자로서 통치의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원리에 따라,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제(대통령제와 국회) 원리를 통해 이를 구현한다는 헌법의 골간을 무너뜨린 사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이후 시민들이 진실의 순간을 맞을 시공간은 헌법재판소다. 헌재는 대한민국 헌법의 호민관이다. 물론, 헌재가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한 것도 수두룩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제 상식 있는 시민들이 ‘호민관의 호민관’으로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늦어도 1~2월 안에 탄핵 심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헌재를 지키고 보호하며 감시해야 할 것 같다.

해방정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북청년단이 다시 등장하고, 지난 10년에 걸쳐 심심찮게 백색 테러를 목격했던 터라 헌법재판관들에 대한 신변 안전과 보호는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의도적인 교통사고를 포함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하기 솔직히 어렵다. 헌법의 호민관 구실을 제때 할 수 있도록 헌재를 응원하고 지켜줄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이 헌법재판소 앞을 찾아와 국정 농단을 심판해달라는 염원의 108배 릴레이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눈앞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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