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적박'이란 말이 있다. "박근혜의 적은 박근혜"란 뜻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이 말은 "박근혜의 말은 박근혜의 말로 반박이 가능하다"는 용례로 쓰인다.

예컨대. 한나라당 의원이었을 때 "소주와 담배는 서민이 애용하는 것 아닌가? (담뱃값 인상으로) 국민들이 절망하고 있다"고 말하고선 대통령이 된 후에는 "국민 건강을 위해서 담뱃세 2000원 이상 인상해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어떤 경우든지 역사에 관해서 정권이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하던 입으로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육 정상화도 미래의 주역인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고 말을 바꾼 것들이 그런 케이스에 해당된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저는 지키지 못 할 약속은 하지 않았고 한 번 약속한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켰다"고 호기롭게 내뱉고, 이어 2012년 대선레이스에서도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란 슬로건을 간판으로 삼았기로 이런 ‘박적박’ 놀이가 더욱 국민들 마음에 비수처럼 날카롭게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신뢰의 아이콘에서 거짓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수직낙하’한 한 인물의 서글픈 인생유전이여~!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등 노동자들이 재벌 총수들의 처벌을 촉구하며 조형물과 함께 새누리당사로 이동하고 있다. 이날 국회에서는 삼성, 현대차, 롯데, 한화, LG, CJ 등 재벌 총수들이 증인으로 참석해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열렸다.(연합뉴스)

각설하고, '박적박'을 다시금 꺼낸 까닭인 즉, 탄핵을 목전에 둔 작금의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화법과는 달리 주부 술부가 명확해서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은 박근혜의 명언 퍼레이드를 잠시 감상해 보시라.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하며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

"제왕적 총재는 제왕적 대통령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1인 지배 정당을 종식해야 한다"

"어느 대통령이 자기 정권이 부패로 얼룩져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를 바라겠느냐. 그렇지만 당의 제왕적 총재가 대통령 후보가 되고 그가 당선되면 바로 총재와 유대를 가진 사람들로 둘러싸인 제왕적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참으로 놀라운 발언, 아니 혜안 아닌가. 자신에게 닥칠 미래의 운명을 이토록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에도 우주의 기운을 간직한 최순실의 도움이나 컨펌이 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오싹해지기도 하지만.

이후의 풍경은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바다.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배신의 정치는 끝장내야 한다"면서 청와대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장하고 "나쁜 사람" 운운하며 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하나 둘 찍어내는 모습을 보고서 '제왕적 대통령' 정도가 아니라 측천무후의 위세마저 떠올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최씨 일가와 문고리 3인방, 십상시 등등 몇몇 유대관계를 가진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부패로 얼룩져 불행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도 이 모양 제 말을 제 스스로 배반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니었던가.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탄핵정국의 와중에서 '제왕적 대통령'이란 낯익은 단어가 한동안 출몰했다. 삼김시대와 더불어 사라졌던 추억의 단어가 박근혜 탄핵과 맞물려 좀비처럼 부활해서 세종로와 여의도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종편을 비롯해서 메이저신문사, 그리고 제3지대를 부르짖는 정치인들은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며 내각제로의 개헌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 갑자기 개헌을 들이대는 저들의 속내를 뉘라서 모르겠는가. 겉으로는 국민을 내세우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탄핵으로 치닫는 촛불대오를 흩뜨리고 나아가 현재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를 경계하면서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권력을 분점하자는 음산한 계산이 그 밑에 깔려 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아무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지금은 조롱거리로 전락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 D-2를 앞두고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남 탓을 하고 있을까?

아서라. 말아라. 박근혜의 불행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그를 예정된 비극으로 몰아넣은 건 애당초 지키지도 못 할 말을 여과 없이 내뱉은 자신의 입이다. 그를 회복 불능의 유폐로 몰아넣은 건 제 입으로 배설한 배반의 언어다.

"배신의 정치를 끝장내야 한다"던 박근혜의 결기는 국민을 배신한 대통령을 한 순간도 더는 보기 싫다는 촛불의 민의에 의해 실현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나쁜 사람’을 들먹이며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요?"라고 묻던 박근혜의 집요함은 "나쁜 대통령이 아직도 청와대에 있어요?" 라는 광장의 메아리로 되돌아오기에 이르렀다.

아마 후대의 사가들은 이때를 평가하여 가로되 '말의 무서움을 온 국민이 실감하게 된 시기'였노라고, 그리고 이후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들마다 박근혜의 몰락을 반면교사 삼아 자신의 입을 경계하고 언어의 신실성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게 되었노라고 그리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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