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표 드라마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새롭다. 자기복제이라는 말이 있듯이 동일한 작가와 연기자에게는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못하는 색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무조건 부정적이지도 않고 또 긍정적일 수도 없다. 문제는 그것을 관객이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동일선상에서 더 나아졌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태양의 후예>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김은숙 작가의 신작 <도깨비>는 마치 수년 간 갈고 닦은 듯한 탄탄한 구조와 김은숙 특유의 말장난 식 대사가 더해져 맛깔 나는 드라마의 성찬을 내놓고 있다. 같은 듯 다른. 그리고 더 대단한 것은 너무도 식상해져서 더 써서는 안 될 것 같은 신데렐라 이야기를 아주 산뜻하게 살려냈다는 사실이다.
그 비결은 신화의 채용이다. 900살 넘은 도깨비와 19살 소녀의 사랑.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거부감 없게 만드는 것 역시 신화의 설득력이다. 조금 말이 안 되는 문장이기는 하지만 신화라는 특수성이 그렇다. 인류의 문화와 예술이 그 신화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이 신화는 사실 현재도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다.
이를 테면 할리우드가 기를 쓰고 아득바득 덤벼드는 히어로 영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깨비>는 그런 히어로 영화보다 더 영리하다.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된 장르지만 그 중에는 신데렐라 스토리도 존재한다. 알다시피 그 플롯은 너무도 식상하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로맨스를 살려야 하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신화의 비극을 살짝 가져온 것은 죽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살려내는 묘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2회에서 도깨비는 소녀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나에게 뭔가를 발견했다면 넌 날 아주 많이 원망했을 거다” 아직 소녀는 이 말을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알게 된다면, 그러니까 소녀가 도깨비의 가슴부터 등까지 관통되어 있는 녹슨 검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 뽑아주고 싶어질 것이다. 그것은 소녀가 도깨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고 곧 그 행위로 인해 도깨비는 봉인된 죽음의 씰을 뜯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도깨비와의 첫 만남에서 영혼 1도 없는 말투로 “사랑해요”라고 했다. 그 모습이 정말 철없고 천진난만해서 귀엽고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된 비극의 복선이라는 것쯤은 대충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이것 참 곤란한 일이다. 해피엔딩에 취약한 시청자에게 무거운 딜레마를 던져놓고는 의기양양하게 비극의 로맨스를 끌고 가는 것이다.
‘결국엔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데요’ 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비극을 예고하고는 이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의 이야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장미가 넘친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가능성 없는 해피엔딩에 기대어 한 회 한 회 조바심으로 이 드라마의 전개를 따라갈 시청자의 오장육부는 온전할 턱이 없다.
말이 쉽지 이것을 드라마로 만들어서 해낸다는 것은 정말 말이 쉽지가 답이다. 그 어려운 것을 또 해낸 작가다. 사실 요즘 시국에 드라마나 예능에 몰입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그런 거리의 문제들을 잠시 덥게 만들 정도로 끌어당기는 완력이 무지막지하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거리에서 더 힘을 쓰기 위해서도 휴식을 필요한 것이다. <도깨비>는 새로운, 더 센 힘을 쓰기 위한 휴식의 계기로 삼기에 너무도 적절하다. 금 나와라 와라 뚝딱! 하듯이 도깨비의 신묘한 능력이 간절한 우리들이기 때문에라도 더욱 그렇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