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를 줄 수 있는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났다. 대통령 스스로 하야나 퇴진을 선언한다고 해도, 면죄부를 주자고 정치권이 선뜻 나설 수 있는 시간은 지났다는 뜻이다. 하물며, 국정공백 최소화를 이유로 국회가 퇴진 일정을 합의해 잡아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국민과 시민이 면죄부를 용인할 수 있는 임계점은 이미 지났다. 그럴만하다. 벗겨도벗겨도 속이 드러나지 않는 양파껍질처럼 ‘저게 무슨 대통령이야?’이라는 조롱을 던지게 하는 범죄 의혹과 증거가 그치지 않고 불거져 나오고 있다.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받겠다는 자신의 약속도 헌신짝처럼 버렸다. 온갖 증거가 수두룩한데도 최순실 씨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행태를 보면 특검 수사를 제대로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지 싶다. ‘봐주자’는 얘기도 어지간해야 꺼낼 텐데 씨알도 안 먹히는 상황이 됐다. ‘엄마, 아빠’가 불러내는 ‘불쌍하다’는 감정 정도가 유일한 비빌 언덕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대통령이 더 좋게 보이지 않는다. 정말 마지막까지 바닥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다. 하기야, ‘국회가 퇴진 일정 잡아달라’는 게 대통령의 머리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선세력의 국정 농단을 방치하고 편승하며 호가호위를 했던 자들 중 하나가 그랬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책임의 정치’를 보여주기보다는 대통령의 불행한 과거까지 다시 불러내는 ‘주술의 정치’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하루 만에 새누리당은 4월 퇴진, 6월 대선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탄핵소추를 앞두고 꺼낸 3차 담화가 나오고 여기에 새누리당이 이런 당론을 채택했으니 더 이상 말을 안 해도 노림수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지점은 분명히 해둬야 한다. 국회가 퇴진 일정에 합의한다는 것은 면죄부 발행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퇴진 뒤에 ‘큰집’에 가서 국록을 먹지 않겠다는 보장이 없는데 퇴진 일정에 따르겠다고 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4월 퇴진, 6월 대선’ 정도면 괜찮은 일정이라고 혹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국회가 현재 시점에서 면죄부를 발행하는 데 합의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골든타임’은 지난 지 한참이다. 그렇기에 합의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게 돼 있고, 초읽기에 몰린 야권은 국민과 시민의 뜻을 배반하는 지경까지 몰릴 수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 나경원 의원 등이 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비상시국위원회 대표자-실무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진정성이 없는 잔머리는 얼마 못 가게 돼 있다. 김무성 전 대표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권을 힐난하며 탄핵소추에 앞장서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랬던 분이 지금은 친박과 함께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부여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한 마디로 웃기는 행태다. ‘부역세력, 네가 뭔데 면죄부를 주자고 앞장서냐?’고 해줄 일이다. 천생이 부역세력, 양보해서 편승세력이라는 점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일깨워 준다.

어쨌든 김 전 대표를 비롯한 비박 세력은 대통령을 따라 친박과 함께 몰락하는 길을 선택하는 듯하다. 애초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 게다. 비박 역시 합리적 보수로 거듭나기엔 함량 미달이었는데 이를 뛰어넘기를 바랐던 것인지 모르겠다. 스스로 앞장서겠다는 탄핵소추가 부결되는 순간, 비박은 친박과 함께, 아니 친박보다 훨씬 더 간사한 세력으로 낙인찍혀 대통령과 함께 침몰할 것이다. 야권도 담담하게 지켜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같이 죽겠다는데 내버려둬야지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말리다 휩쓸리면 야권도 죽지 말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시민과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이 지금으로서는 없다. 예정대로 탄핵소추를 가결해 대통령을 직무정지시키고 특검을 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조건 없는 용단을 내리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온 국민과 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된다. 그래서 황교안 대행체제가 국민과 시민, 정치권의 묵인 아래 대통령의 망명을 용인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탄핵소추 가결 이후, 황교안 대행체제가 할 가장 중요한 업무가 공정한 선거관리와 함께 이 일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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