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癡愚)’ 어리석고, 어리석다. 그의 이름이다. 호적상의 그것이 아니다. 그는 왜 스스로 ‘어리석은’ 존재라고 자신을 낮추어 규정했을까? 그의 이름은 문신을 시술하는 행위자로 살아가려는 자신에게 가해진 첫 번째 경찰 단속 과정에서 결정됐다. 경찰은 그를 충분히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때부터 그는 ‘어리석다’는 의미의 ‘치우’라는 이름을 자신의 인생에 새겨 넣었다.

2005년 초 아무리 노력해도 친해질 것 같지 않던 기계음의 두려움과 두통을 참아내야만 했던 그 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난 문신을 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누구나처럼 내 몸에 문신을 새길 것이라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던 터였다. 두렵기 그지없었다. 사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무엇인가를 그려 넣는다는 행위는 나에게 극단적 두려움과 고도의 신중함을 요구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문신이 불법일 수 없다는 아주 당위적인 상황에 대한 동의, 그리고 그에 대한 지지 때문에 오래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난 왼쪽 팔에 ‘평화 마크’를 그려 넣었다. 그저 문신을 하고 싶다는 타투이스트의 소박한 요구에,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는 도박 같은 명분에, 일단 왼쪽 팔부터 내밀었던 것 같다.

▲ 타투이스트 '치우' ⓒ 김형진
그 때도 지금도 ‘치우’의 몸에는 문신이 가득하다. 캔버스와 같은 그의 몸이다. 2000년 처음 문신을 시작할 당시 그의 몸에는 문신이 하나도 없었다. 타투이스트의 홈페이지를 제작하던 그는 썩 괜찮은 노동 조건에 취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문신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사래를 쳤다. 몸에 낙서나 하는 “정신없는 사람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돈’ 때문에 ‘타투 머신’을 잡았다. 그렇게 문신쟁이로 살아온 지 벌써 10년, 그는 더 이상 문신 있는 사람들을 “정신없는 사람들”로 보지 않는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다.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던 문신 역시 문화의 코드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치우가 만나는, 치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문신은 더 이상 낙인도 철없는 낙서도 아니다.

치우가 처음 문신을 할 때 포대기에 쌓여 등에 엎여 있던 그의 아이는 이제 10살이다. 그 아이가 커가는 속도만큼이나 문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빨리 변해왔다. 아이가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는 매직을 들고 친구들 몸에 그림을 그려줬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 아버지의 직업이 ‘타투이스트’라고 했을 때 선생님은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불과 몇년 전의 일이다. 아이 친구들의 부모들을 만나면 직업이 무엇인지 당연히 숨겼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오히려 아이 친구들의 부모가 문신을 해달라며 그를 찾아올 정도로 바뀌었다. 불과 몇 년 사이의 변화이다.

손님들도 달라졌다. 작업을 시작한 초반에는 “손님은 주로 깡패였다. 일반인(?)은 문신을 거의 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깡패 손님은 줄고, 다양한 사람들이 문신을 하고 싶다며 찾아온다.” 물줄기가 바뀐 셈이다. ‘깡패’ 집단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문신’은 가장 보통의 존재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문화적인 매력을 던지는 표현의 방식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문신을 한 연예인들이 칭칭 감고, 싸고, 가리던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G-드래곤의 레터링 문신이 <무한도전>의 ‘민두래곤’에 의해 “민서야 니 애비다”로 패러디되는 메타적 시대이다. 그는 전혀 두렵거나 부끄럽거나 어색해 하지 않았다.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들의 전유물로 여겨진 문신이 ‘문화’와 ‘패션’의 아이콘으로 변모하게 된 것을 치우는 “2002년을 기점으로 본다”라고 이야기한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사회에 참 많은 것을 남겼다. 스스럼없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에네르기는 이렇듯 다양한 사회적 주름을 남겨 두었다. 기억나나? 모두 붉은 옷을 입긴 했지만, 평범한 티셔츠는 찢기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면서 다른 색깔을 보여주었던 것을.

그렇다고 2002년 월드컵의 축제적 의미가 문신의 이미지를 반전시킨 전적인 공로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분히 논리적 오류이기도 하다. 2003년 6월 타투이스트 ‘김건원’이 경찰에 긴급 체포되는 사건을 빼먹을 수 없다. 그녀는 영화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등 각종 영화에서 문신 분장을 맡으며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한 남성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그녀에게 문신을 받았다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불똥이 그녀에게로 튀었다. 문신은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도 의료법에 의한 처벌 대상이다. 현행 법률은 문신을 의료행위로 의사면허증이 있는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당시 그녀는 문신 합법화에 발벗고 나섰고, 많은 문화예술인과 법조인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타투이스트 김건원 사건은 오히려 문신을 대중들과 좀더 가깝게 하는 계기”였다.

그러나 여전히도 법은 타투이스트들의 발목을 잡는다. 문신을 의료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 의료법에 의해 문신은 ‘의사’가 해야지 합법이다. 허나 ‘타투는 타투이스트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 했던 김건원의 말처럼 문신은 의료행위가 아니라 문화적·예술적 행위다. 그래서 타투이스트들은 도안을 그리고, 계발하고, 착안하고, 창작하고, 그리고 몸에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가 탐구하고, 실천한다.

▲ 치우가 작업한 레터링 이미지, 모델은 MC Spirit 헤비급 챔피언 위승배이다 ⓒ 치우 미니홈피
치우는 그런 면에서 썩 괜찮은, 노력하는 타투이스트다. 그는 “우리나라만의 도안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문신 시술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아직 그의 도전에 흔쾌히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름 해보려고 도안을 만들어서 손님에게 권하면 ‘저한테 왜 그러세요?’라고 묻는다. 사람들은 아직은 정형화된 그림을 많이 원한다.” 그는 단청모양의 문신을 여성의 팔에 새긴 것을 가장 기억에 남는 문신으로 꼽았고, 무작정 베컴 문신을 똑같이 해달라는 손님을 가장 개념 없는 손님으로 꼽았다.

그는 얼마 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겁없이 덜컥 ‘한국타투인협회’(www.taokorea.or.kr)를 구성하는 일에 나선 것이다. 그는 지금 각자의 개성이 너무 뚜렷한, 아니 그 멋에 사는 문신쟁이들을 ‘조직화’하느라 악전고투하고 있다. 문신을 돈벌이로만 여기고 너무 쉽게 덤벼드는 행태에 대한 업계 차원의 자율적 반성이기도 하다. 그는 어려운 말을 하지 못한다. 다만, 5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몸에 실수 아닌 실수를 해야만 익힐 수 있는 기술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라고 느낄 뿐이다. 위생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일회용 바늘만 쓴다면 별로 걱정할 건 없다.

어쩌면 문신은 마지막 남은 장인적 예술 장르일지도 모른다. 교육과 학습이 아닌 부단한 훈련으로 완성되는 궁극의 경지이다. 연습은 없다. 사람 몸은 캔버스가 아니다. 자신의 허벅지에서 시작했던 사소한 열정을 세계와 견주려 하는 어느 젊은 타투이스트의 열정. 하지만 여전히 문신쟁이라고 하는 천대받는 직업을 고민하는 직업인의 순수함. 의사가 아닌 그가 타투머신을 잡아야 하는 진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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