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이하 말랑 미디어)는 상반기 결산이다. 말랑 미디어의 기획 의도는 정치, 사회, 경제 그 어느 곳 하나 가팔라지지 않는 곳이 없는 척박한 상황이지만, 제목처럼 주말 만큼은 좀 말랑한 얘기를 해보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었다. 때때로 말랑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고, 진부한 기획으로 외면(!)을 받기도 했지만, 매주 주말 콘텐츠를 고민하는 꿋꿋함을 잃진 않고 기어이 달려왔다.

이번 말랑 미디어는 상반기 결산이다. 차마 한 번 보기 아까운, 검색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아쉬운 3편의 글이다. 쟁쟁한 후보작과 오랜 고민 끝에 대중문화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잡은 '토이남'에 관해 꽤 이른 시간에 주목했던 김현진의 글과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워낭소리'에 관한 이용석의 다른 시선 그리고 김형진 기자의 타투이스트 '치우' 인터뷰를 골라봤다. 당신의 말랑하고 달콤할 주말이 물폭탄에 잠기지 않길 기원한다. <편집자>

07년도에 토이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글을 썼을 때 뭐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문화평론에 능한 지식인도 아니고, 사회 조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어떠한 신인류의 출현처럼 ‘토이남’이라는 단어를 문화적인 현상으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 사태를 크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그저 연애 ‘시장’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교미’에 대한 이야기다.

자연과 암컷과 수컷, 그리고 약육강식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잘난 수컷이 좋은 암컷을 얻는다. 암컷 역시 우월한 암컷이 우월한 수컷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우월해지기 위해 모두들 노력하고, 그 과정의 하나로 수컷은 암컷을 얻기 위해 진화한다. 물론 암컷 역시 수컷을 얻기 위해 진화해 왔다. 지금까지 한국의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강고한 법칙이 있었고, 이것은 그다지 흔들린 적이 없었다. 남자는 둥지를 짓고, 그 둥지로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왔다. 묵묵히 돈을 벌고,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둥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줘야 암컷은 둥지를 트고 알을 품기 시작하는 것이다. 된장녀건 마초건 좀 서글퍼도, 이건 자연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동물은 죄다 그런 거니까. 다시 한 번, 나는 문화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저 자연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다.

▲ 한국일보 5월8일자
07년 당시 토이남이 어쩌고 하는 글을 끄적거리던 나는 장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글은 장난기로 시작된 글이었다. 90년대 초반, 공일오비로 시작해서 90년대 중반에는 이승환(특히 오태호와 함께 활동했던 이오공감), 최근에는 성시경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 감성에는 분명히 한 가지 큰 줄기, 관통하고 있는 맥이 있었다. 위협적이지 않은 남자들, 전형적인 순정만화 포즈로 여자를 벽에 밀어붙이지 않는 남자들, 물론 그럴 완력이 없는 경우도 꽤 있고, 술마시고 전화해서 야 이 망할 기집애야, 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숨을 삼키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남자들. 당시의 나는 곱게 큰 중산층 젊은 남자 아이들을 심술궂게 놀리고 있었던 거였다. 내가 그때 생각한 ‘토이남’이란 그런 것이었다. 적어도 방배, 아니면 반포에서 자라난 남자애들, 크게 가난해 본 적도 없고 크게 고생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대부분 착한 그 남자애들, 그래서 얼핏 보기엔 한없이 순수하고 착해 보이지만 자신이 본 적 없는 흉하고 추한 것을 보면 한없이 속 좁고 저열해지는 남자애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남자애들. 그 순진한 꿈에 동조해 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중산층 이상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빈민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쭉 빈민일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살짝 놀려댔던 거였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지금 내가 생각한 토이남은 그때 생각했던 그들이 아닌 것 같았다. ‘소맥’을 한번에 화끈하게 비우지 못하는 그 남자애들은 아마 형님으로 대변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인자일 것이다. 내가 아는 토이남들은 대부분 귀여운 주량을 자랑했고, 병아리 눈물만큼 마시고도 다음날 죽어라 해장을 해야 하는 효율 제로의 한심한 간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아마 내가 밥맛없어하는 것보다 훨씬, 힘 있는 형님들은 아마 그들을 싫어할 것이다. 하늘하늘한 몸에 스키니 진을 입고 ‘간지’를 자랑하는 그들은 아마 우람한 이두박근도 없고 그러므로 남자애들의 싸움질에서 이겨 본 적은 드물 거였다. 그런 아이들이 정통적인 방식으로 둥지를 내세우며 암컷을 유인하는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결혼 전에도 일하고, 결혼 후에도 일하는 것이 당연해진 작금의 사회에서 여자들은 더 이상 간택되는 존재가 아니라 ‘된장녀’라는 야유를 받으면서도 그러거나 말거나 편하게 살기 위해 남자들을 냉철하게 가늠한다. 정통적인 방식의 경쟁에서 이미 마이너한 남자애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적다. ‘토이남’이란, 틈새시장이다. 그래도 평생 여자 굶고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수컷 나름대로의 시장 개척인 것이다. 어차피 외제차를 몰면서 여자에게 카드를 팍팍 그으면서 호기를 부릴 수 없고 화려한 브랜드 아파트의 둥지를 마련할 수 없는 남자들 중의 일부가, 그냥 찌질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선택했다. 양주 긋고 백화점에서 <프리티 우먼>처럼 해 줄 수 없는 남자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보기만 해도 당뇨병에 걸릴 것 같은 아이스크림 얹은 와플을 넙죽넙죽 잘도 먹는다. 알코올 기운이 훅 끼치는 소주 냄새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도 싫어하는 여자들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고 그들은 예쁜 바에 앉아 달짝지근한 와인을 마시거나 색깔 고운 칵테일을 마신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실 돈이 적게 든다. ‘토이남’은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 이성애자라면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얘들이 틈새시장 개척해서 연애 좀 하고 살겠다는데, 거기다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물론 토이남에게도 그림자는 있다. 난 니가 원하는 대로 할게, 하고 좀 밀어붙여 줬으면 하는 어떤 순간에도 여자에게 결정권을 넘겨 주고 자기 손에 흙 안 묻히려 하는 착하고 유약한 남자들, 여자에게 결정권을 주는 양 하면서 실은 한 걸음 물러서서 ‘묻어 가려’ 하는 것이 바로 토이남의 그림자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원래 자연은 냉정하다. 신자유주의가 펄펄 날뛸수록, 돈으로 안 되는 남자,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이길 수 없는 남자들은 어떻게든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실은 우월한 암컷이 못 되므로 나도 서글프다, 남자들이여. 그러니 토이남이 어쨌니 저쨌니 하는 단어에 너무 발끈들 하지 마시라, 여자들은 아주 옛날 옛적부터 그런 자로 재단되어 왔으니까. 뭐 다 알고들 있겠지만 우리는 아주 옛날부터 당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해 왔으니까, 너무 억울해 하지 마시길. 자연이 원래 그런 거다. 토이남은 문화가 아니다. 암컷과 수컷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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