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이라면, 혹은 아이를 잠시나마 잃어본 적이 있는 가슴 철렁한 경험을 했던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 감정이입하기가 쉬울 것이다. 보모 한매(공효진 분)만 믿고 아이를 맡겼다가 보모와 아이가 동시에 실종되는 사태를 겪는다면, 더군다나 아이가 없어진 것도 억울한데 이혼한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주인공 지선(엄지원 분)의 얕은 꼼수로 이전 시댁과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미씽: 사라진 여자’는 시댁과 경찰의 오해를 피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사라진 보모 한매의 뒤를 추적하는 워킹맘 지선의 ‘보모 찾아 삼만 리’ 쯤 되는 영화다. 지선이 찾아야 할 주적(主敵)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요람을 흔드는 손’과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다. 한매 외에는 아이를 유괴할 용의자가 전무(全無)하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 스틸 이미지

그럼에도 이 영화를 ‘요람을 흔드는 손’의 아류로 폄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요람을 흔드는 손’의 보모는 주인공 부부를 괴롭히거나 해칠 뚜렷한 목적을 갖춘, 주적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갖춘다. 하지만 ‘미씽: 사라진 여자’는 ‘요람을 흔드는 손’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아이를 유괴한 한매가 단지 주적의 위치에 자리하는, 단죄하고 정죄해야 할 대상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는 여성이라는 점에 있어 ‘요람을 흔드는 손’과 차별화된다.

‘요람을 흔드는 손’의 보모는 목적의식이 뚜렷하다. 주인공 부부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뚜렷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미씽: 사라진 여자’ 속 보모 한매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진 이유는 ‘요람을 흔드는 손’과는 결이 다르다. 주인공 지선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는 의미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매는 지선의 아이를 유괴한 것일까. 이 이유를 캐묻기 위해 한매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한매를 단지 몹쓸 여자로만 치부하기는 어렵게 된다. 한매가 지선의 아이를 유괴한 데에는 한매 나름의 ‘사연’이 있기에 그렇다.

이 사연에 대해 분석을 한다면 이는 이제 갓 개봉한 영화를 볼 관객의 지적 즐거움을 앗아가는 스포일러 행위가 될 공산이 될 것이기에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을 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요람을 흔드는 손’과 구분되는, ‘미씽: 사라진 여자’ 속 한매를 단지 아이를 유괴한 유괴범으로만 매도하지 못하는 건 한매의 가슴 속에 맺힌 ‘사연’ 때문이다.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 스틸 이미지

이 사연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은 한매에게 심적으로 돌팔매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매의 피 맺힌 사연에 일부나마 공감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인 지선의 사연뿐만 아니라 유괴범 한매의 사연에도 감정이입이 가능할 집중의 묘미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한매는 외국인이라는 타자다. 그렇기에 그녀가 한국인으로부터 겪는 애환을 통해 관객은 한매에게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에는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다. 수사 현장에는 형사(김희원 분)와 같은 수사관만 출입할 수 있음에도 지선이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는 건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매와 같은 외국인이 유괴범이라는 설정을 통해 타자는 위험하다는 인식을, 혹은 은연중에 타자를 잠재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영화의 유일한 약점이기도 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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