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씨의 자살 사건 계기로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온 이른바 연예인의 노예 계약 관행이 과연 개선될 수 있을까? 이미 오래 전부터 연예인 계약의 불공정 약관을 지적해왔던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를 발표하면서 연예인 계약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권고한 새로운 표준계약서에는 연예인의 전속계약 기간을 7년 이내로 한정하고, 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기존의 약관 조항들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령 연예인이 자신의 행적을 기획사에 상시적으로 통보해야하는 조항을 금지하거나 연예기획사 대표가 술시중, 성상납 등과 같은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요구를 할 경우 소속 연예인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부여하게 셈이다. 또한 연예인의 전속이 바뀔 경우에는 반드시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한다는 것과 전속기간이 끝나도 연예인의 예명은 당사자에게 귀속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연예기획사들의 연합체라 할 수 있는 한국연예제작자협회(이하 연제협)은 곧바로 공정위의 표준전속계약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유인 즉은 이번에 권고된 전속계약서는 당사자 간의 자유계약의 원칙을 위배하고 있고 사업자의 기본 권리를 제한하고, 연예산업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신인 연예인의 데뷔 기간이 평준 3-4년 정도 걸려 초기 투자비용을 뽑기 위해서는 7년 기간은 현실성이 없고, 연예기획사가 일방적으로 연예인들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 연제협의 지적이다.

▲ 경향신문 3월14일자 8면
공권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연예인 인권

사실 공정위가 아무리 좋은 개선안을 만들어도 강제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연제협이 수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봐서는 연제협이 공정위의 안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 장자연씨 자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과 검찰이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된 인물들을 조사했어도 결국 사건의 핵심을 피해갔듯이, 공정위의 표준계약서 권고 역시 연예인의 계약 관행과 연예계 내부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자연 사건과 연예인 인권의 문제는 형식적 제도개선과 공권력으로는 결코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과도한 겹치기 출현, 출연료 떼이기, 폭언과 폭행, 술시중, 성상납 강요와 같은 연예인들이 당하는 인권과 권리 침해는 ‘연예계약서’라는 형식적인 문서와 문구에 결코 존재하지는 않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연예기획사도 이러한 조항을 표준계약서에 포함시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의 인권 침해 사례들은 연예기획사 대표들이 대부분 연예계약서에 명시된 포괄적인 규정들을 관행적으로 악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연예계약서가 아무리 민주적으로 개선된다 해도, 사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관행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아무런 소용이 없다. 특히 신인 연예인들이나 A급 연예인이 아닌 경우 연예계약서 규정에 위반되는 요구를 받았을 때, 과연 얼마나 거부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적인 연예표준계약 제도를 만드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현재 연제협이 사용하고 있는 표준계약서는 대표적인 불공정 약관에 해당되는 것은 사실이다. 현행 약관에는 제작자의 권리는 명시되어 있는 반면, 연예인들은 의무만 명시되어 있다. 전속계약서 5조의 제작자의 권리를 보게 되면 음반, 비디오물, 영상음반, 프로그램출연, 사진촬영, 캐릭터 등에 대한 모든 제작, 복제, 편집, 판매, 초상에 대한 권리를 제작자에게 귀속하게 되어있다. 반면 6조 가수들의 의무를 보면, 가수들은 제작자의 모든 권리취득 업무에 성실히 임해야 하며, 제작사가 원하는 모든 제 3자의 상업적 활동업무에도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말하자면, 가수들이 일단 이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면 자신이 원하지 않은 활동에 대해 사실상 거부할 권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5조 3항에는 제작자가 가수들의 “성명, 예명, 사진, 주민등록등본, 주민등록등본사본, 초상, 필적, 각인 등을 계약에 사용, 수익 처분할 모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해 놓고 있어 제작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수들의 모든 신분들이 예속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이번에 공정위가 제시한 새로운 표준전속계약서는 이러한 독소 조항들을 없애고, 연예인들의 개인적 의견을 존중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연예계의 새로운 문화가 정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헤럴드경제 7월 13일자 26면.
"형님-동생"으로 얽히는 봉건적 문화

그러나 근본적으로 연예인의 계약관계나 제작자에 의한 인권 침해사례들은 제도적인 규제와 강제를 동원하기 이전에 이들의 봉건적 문화에 대한 해체와 연예산업의 부적절한 공생관계의 해소, 그리고 지배 권력에 종속되는 연예계 관행의 단절이 선행되어야 한다. 장자연의 안타까운 죽음을 비롯해서 그동안 수없이 연예계에서 제기되었던 인권 침해사례들은 이른바 연예계약의 수준을 넘어선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권위주의와 부패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연예인과 연예제작자 사이의 관계는 대부분 계약에 의한 이해관계자가 아닌 사적인 인관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이른바 “사장님”, “형님”이란 호칭은 경제적 계약관계에서 형성된 호칭이 아니라 자신을 발탁하고 키워주신 은인으로 간주된다. 한국적 가부장문화나 봉건문화가 연예계의 인관관리에 그대로 적용되면서 연예계약서에 갑과 을은 자연스럽게 주종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봉건적 문화에서 냉정한 계약관계가 관철될 가능성은 많지 않으며, 특히 연예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계약서의 ‘을’에 해당되는 당사자는 무의식적인 복종의식을 갖게 된다.

이러한 봉건적 가부장적 관계는 연예기획사 내부가 아닌 외부로 확대될 때는 거꾸로 새로운 형태의 종속관계가 형성된다. 연예계 내부에서 주인의 역할을 하던 제작자들은 이른바 방송계로 이동하면 곧바로 노예의 역할로 전락한다. 연예기획사 대표들은 자신이 키우는 연예인들을 방송 출연시키기 위해서 방송계 제작자들에게 자발적 복종을 요청한다. 연예제작자들은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방송제작자들에게 인간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하고,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지난 1997년과 2002년, 그리고 2008년에 목도했듯이 부적절한 PR비가 오고가기도 한다. 연예제작과 방송제작자의 인관관계 역시 냉정한 비즈니스의 관계가 아닌 “형님-동생”하는 봉건적 관계로 이행하고 이것이 사적인 영역에서는 강력한 패밀리 의식을 형성하게 만든다. 이러한 봉건적 관계를 즐기는 유력 연예제작 PD들에게 소속 연예인들을 은밀하게 건네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사적인 인관관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예제작자들과 방송제작자들의 공생관계를 자신의 권력에 활용하는 또 다른 그룹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의 삐뚤어진 정치적 지배권력 그룹이라 할만하다. 한국사회 권력의 중심에 서있는 소수 사교그룹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연예계를 활용하고 싶어 한다. 내가 아는 모 방송사의 연예제작 간부들이나 PD들로부터 특정한 연예계 인사들을 소개받고 싶어 하고, 방송제작자나 연예제작자 역시 이러한 은밀한 요청을 이른바 스폰서로 간주하고 충성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른바 권력자들의 밤의 사교문화에 필요한 연예인들을 연계하기 위해 방송제작자와 연예제작자들이 동원되는 것은 어찌 보면 한국적 가부장 사회에서는 당연한 듯이 보인다. 이른 정계, 재계, 방송언론계로 통칭되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사교문화의 권력 행사에서 연예인들은 어찌 보면 공생관계, 혹은 먹이사슬의 거의 밑바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장자연 사건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삼중의 공생관계 혹은 먹이사슬이 만들어낸 가부장적인 권력 행사방식에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지 않는다면, 공정한 연예계약서가 만들어진들 연예인들의 인권침해나 권리 침해들은 여전히 “계약서의 이면”에서 횡횡할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가부장적 권력관계의 해체나 이들의 자발적 성찰, 연예계의 뼈아픈 자기반성과 새로운 시장의 창출, 그리고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지속적인 감시활동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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