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이 급물살을 탔다. 빠르면 12월 2일 늦어도 9일이면 국회를 통과할 것이다. 이제 탄핵에 맞선 모든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 전직 국회의장들과 정계 원로들의 내년 4월 하야 권유는 충정이겠지만 그들이 민심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탄핵안 가결은 박근혜 개인의 몰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체제가 수명을 다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남았지만 헌법재판관들이 상황을 쉬이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더 중요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박근혜의 직무를 정지시킨다고 새로운 대한민국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광장의 염원을 받들어 옛 집을 허물고 국민을 위한 새 집을 지어야 한다.

26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5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이 함성을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그리스의 집권당 시리자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총선공약(porgrams)을 발표하면서 '국가재건계획을 위한 네 개의 기둥'이란 제목을 달았다. 네 개의 기둥은 인도주의적 위기에 맞서기, 경제의 재출발과 조세정의의 추진, 고용 회복을 위한 국가 계획, 민주주의 심화를 위한 정치 시스템의 전환 등이다. 멋진 표현이다. 곧게 뻗은 석주가 특징인 신전의 나라 그리스답다. 확실히 아름답고 오랜된 집은 기둥이 좋다. 우리 절집들을 보아도 그렇다. 시리자의 목표가 국가재건이었듯이, 지금 광장의 염원도 새로운 나라 만들기다. 우리에게는 어떤 기둥, 몇 개의 기둥이 필요할까?

첫째, 튼튼한 민주주의다. 우리는 수많은 헌신과 희생으로 일군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정치권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지 못했다. 불가역적인 민주화를 위해 국민의 힘이 중요하다. 그 방안에는 독일식 시민정치교육이나 국민의 힘을 직접 발휘하는 국민탄핵, 국민발안과 같은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포함된다.

둘째, 경제민주화다. 재벌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을 넘어 주범이다.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는 불평등과 부패의 뿌리이자 이제는 역동적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이를 그대로 둔 채 짓는 집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셋째, 사회정의다. 특권과 반칙으로 무장한 기득권 세력을 발본색원하지 않고 정의를 기대할 수 없다. 전관예우를 받고, 관피아가 되고, 가진 자들이 더 적은 세금을 내고, 돈과 권력으로 졸업장을 사고, 끼리끼리 자녀취업을 챙기면서 쌓아올린 특권의 성채 앞에서 청년들은 좌절하고 있다. 무너뜨려야 한다.

넷째, 분권이다. 권력집중의 정도는 부패의 크기와 비례한다. 제왕적 대통령제, 지방정부를 억압하는 중앙정부, 시장위에 군림하는 경제관료,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 모두 부패의 온상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다. 분권형 대통령제,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관치경제의 탈피, 검찰권 기능별 분산 등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나누면 된다.

다섯째, 합의제 민주주의다.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고착시킨다. 여야 양당은 중앙권력을 놓고 피터지게 싸우는 한편, 기득권을 유지를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사이좋게 가로막는다. 한국정치가 비효율과 무능에 빠진 구조적 원인이다. 선거 제도를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바꾸면 다당제가 이루어지고, 정당정치가 발전하고, 연합정치가 가능해진다.

여섯째, 한반도 평화다. 한반도 평화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민주주의를 노리는 안보상업주의를 일소할 수 없다. 한반도 평화는 대한민국이 한반도를 딛고 동북아를 넘어 유라시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디딤돌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잊지 말아야 할 꿈이다.

일곱째, 생태주의다. 4대강 사업은 구체제의 일부인 MB정권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막지 못했다. 우리 국민이 생태주의적 가치에 대한 신념이 충분치 못했던 탓이다. 예산낭비라는 경제적 근거만으로 비판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생태적으로 더 성숙해야 하고, 정책도 큰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기후변화와 같은 글로벌 생태문제에서도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책 「지혜의 일곱기둥」은 아랍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자신의 활동기록이자 내면적 성찰의 기록이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푼다"는 <잠언>의 한 구절에서 딴 제목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그를 더 잘 기억한다.

새 집을 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좋은 기둥을 얻으려면 시간도 제법 걸리는 일이다. 조기대선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헌재의 판결이 언제 나올지 불확실한 만큼 대선 전에 기둥을 단 하나라도 세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시작이 반이다. 대선주자들이 새 집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경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언젠가는 완성될 것이다. 지혜의 일곱 기둥을 세우고,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새 집에서 승리의 잔치를 벌이는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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