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공포물이 범람(!)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합의처럼 보인다. 대중문화를 구성하는 아주 익숙한 등식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글에서 하려는 얘기는 공포 그 자체는 아니다. 공포와 무더위의 관계가 실측 가능 한 것인지 따져 볼 생각은 없다. 단지 궁금한 것은 그 사회적 합의와 등식에 관한 것이다. 당신과 내가 교섭한 것이 아닌 바로 그 합의 그러니까 왜 하필 여름엔 공포물인가?

때때로 우린 ‘장르의 문법에 충실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설명을 듣는다. 어떤가? 내게 그 표현은 때때로 이율배반처럼 들린다. 장르(genre)의 사전적 의미는 ‘공통의 특징을 지닌 사물의 무리’이다. 이 범상치 않은 말은 특히, 창작물을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되면서 얼핏 간단해보이지만 설명하려면 한없이 복잡한, 까다로운 의미를 사용된다. 장르란, 분명하게 정형화 된 어떤 체계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총체적이고 관습화된 형식의 전부를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아주 대략적인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창작물을 설명하는데 있어 '장르'란 단어의 의미적, 범주적 변주는 가히 괴력 가깝다.

▲ 여름만 되면 생각나는 공포 '전설의 고향'ⓒKBS
분명, 창작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을 꿈꾸는 행위일 텐데, 관습화된 형식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창작을 일컬어 완성도가 높다고 찬미하는 일은 타당한가? 행여 일종의 언어유희 혹은 기만적 비평에 가까운 도발은 아니냔 말이다.

그러나 ‘장르의 문법에 충실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표현은 정말이지 매우 익숙한 것이고,(반사적으로 몇몇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실제’한 것이다. 장르는 대중문화를 산업이 포획하기 위한 장치로 시작됐지만, 이후 비평가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떠오르면서 의미와 사용법이 현재에 이르렀다. 단언하건데, 우린 ‘장르’라는 관습화된 형식 없다면 무엇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한나래, 1995)를 쓴 토마스 샤츠는 웨스턴 영화의 관습적인 결투장면의 예를 든다. 등장인물들의 의상, 태도, 총에서부터 미국 개척 공동체의 먼지 나는 거리에 선 자세 등에 이르기까지 웨스턴 영화의 모든 의미 토대는 장르적 세계의 친숙함에 기반 한다. 특정한 논리와 내러티브적 관습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실제 경험에 호소하는 척하지만 실제론 이전에 경험한 패턴에 호소하는 ‘누적 과정’으로 존재한다.

결국, 우리가 어떤 장르에 친숙해지는 것은, 여름에 공포물이 득세하는 사회적 합의에 이른 것은 누적 과정의 결과란 말이다. 소싯적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죽이며 지며보던 ‘전설의 고향’이나 심은하의 변성적 목소리와 시퍼런 눈동자가 작렬했던 ‘M’이나 누군가의 몸에 들어온 귀신을 잡겠다는데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현재의 포맷까지. 우리는 다만 그것이 여름에 하기에, 응당 여름엔 ‘공포’물을 봐야한다는 내러티브 구조 자체에 친숙해진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는 미국 영화가 서로 닮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었는데, 한국 TV는 어떠한가? 장마가 고갯길로 접어들어 여름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공포에 관한 익숙한 ‘기시감(dejavu)’이 TV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별 영역을 가릴 것 없이, 장르를 막론하고 이미 본 것들을 다시 부지런히 재연되고 있다. 몇 년간 공포물의 전통적 강자였던 ‘사다코’를 제치고 메디컬 스릴러, 학교물이 유행하더니 올해는 사다코보다도 훨씬 오래전 패턴인 귀신으로 복귀하여 귀신이 들리거나 귀신이 든 이들을 화면에 세우는 일이 유행이다. 앞서 말했잖은가, 중요한 것은 공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포에 친숙해진 우리의 경험칙이라고.

이제 와서 면구한 얘기이지만, 내가 쓸 글이 아니었다. 난 소위 ‘하나도 안 무섭거든’을 입버릇을 달고 사는 공포 무감의 수용자이다. 내게 가장 공포감을 주는 것은 오히려 '병원 24시'와 같은 프로그램들이다. 현실에 잔인하도록 가까이 닿아있는 누군가의 처연한 삶은 차마 보기가 어려워 채널을 돌릴 만큼 무섭다. 영화중에서는 ‘피와 뼈’가 그랬던 것 같다. 정말로 저런 사람이 살았을 거라는 사실은 잔인했고, 슬픔이 등짝의 멍으로 왼뺨의 상처로, 절름발이에 대한 사회적 시선으로 ‘피와 뼈’에 맺힌다는 사실은 무서웠다. 미디어가 공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써야했지만, 변죽만 울리고 말았다. 이런들 어떠하고, 또 저런들 어떠하리. 말했잖은가, 그건 나와 당신이 교섭한 것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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