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이 예년의 여름들과 결정적으로 이별하는 한 가지는 기상청이 장마의 시작과 끝에 관한 예보를 않는다는 것이다. 기상청은 ‘지구온난화’에 따라 장마전선이 생기기 전이나 후에도, 강한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장마예보가 무의미해졌다면서 장마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예보를 올해부터 중단했다. 그 고뇌와 고충 이해는 해야겠다만,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모든 기획은 ‘달력’ 사업이건만, ‘책력’을 알고 있는 이들이 월일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으니 말이다.

여름이다. 엊그제 전국적으로 경보를 요하는 비가 내렸다. 감쪽같이 하늘이 맑아졌지만, 다시 몇 차례 그런 비가 더 올 것이다. 여름이 가팔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주말기획은 ‘여름’에 관한 것이다. 각각 여름 노출, 노래, 공포에 관해 다룬다. 당신이 생각하는 여름은 무엇인가? 한바탕 물놀이를 하고,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수박이나 한 덩이 먹으면서 귀신 얘기나 좀 했으면 좋겠다. <편집자>

노랑나비 이승희를 기억하는가. 한국인 최초의 플레이보이 모델로 국내에서 한때 붐을 일으켰던 섹시 스타다.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한 <물위의 하룻밤>이라는 한국영화는 예상보다 ‘예술지수’가 높아 므흣한 기대에 차 아내 몰래 비디오를 대여해간 뭇 아저씨들의 헛헛함만 더했다는 후문이지만, 당시 그녀의 인기는 신드롬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녀가 당시 ‘체험 삶의 현장’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땀 흘리는 노동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 방송에 헐리우드의 노랑나비, 당대를 주름잡던 아찔한 몸이 과연 몸뻬바지를 입고 밭고랑에 퍼 앉을 것인가 예의주시하던 사람들은 방송이 시작되자 가벼운 감탄사를 토해냈다. 제작진의 탁월한 선택 때문이었다. 이승희는 제주의 해녀가 되어 일당을 벌어온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타이트한 잠수복을 입고 대한민국의 시청자들에게 늘씬한 그녀의 실루엣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었다.

▲ 이승희ⓒ홈페이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이승희의 사례는 미디어와 노출의 함수관계를 절묘하게 드러내주는 바가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눈길을 끌도록, 그러나 ‘선’은 넘지 않도록. 당연하게도 선의 영토는 끊임없이 확장된다. 지금 같았으면 이승희는 애매한 잠수복 대신 늘씬한 수영복을 ‘갖춰’ 입고 ‘비키니 바’라고 불리는 변칙 영업을 하는 술집에서 일당을 벌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긴, 아직 공중파 방송이 그만큼 모질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노출에 대한 미디어의 욕망이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관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당시 사극에 출연하는 여배우가 어깨만 겨우 드러내는 목욕씬을 찍는 것은 장안의 화제였다. 마치 지금 드라마에서 여배우가 수영장씬을 찍으면 언론에서 온통 ‘몸매 과시’니 ‘섹시 지존’이니 하며 거품을 물어대 시청률 몰이를 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패턴이 그때도 있었던 거다.

아, 그때와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기는 하다. 최근엔 남자배우들의 옷을 벗기는 것도 퍽이나 유행인 것처럼 보인다. 어지간한 배우들은 드라마에서 샤워장면이나 수영장 장면으로 ‘명품 복근’ 자랑에 여념이 없다. 남자배우들의 노출은 여성 노출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적은데다가 여성들의 채널선택권이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아직 노출의 본령(?)은 여성 연예인들이다. 여름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예능프로들은 발리로, 푸켓으로, 보라카이로 날아가 해변 특집을 편성한다. 가수들은 가슴과 S라인과 허벅지 노출 비율을 최적화시킨 의상으로 무대에 오른다. ‘뜨거운 눈’으로 이들을 지켜보는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이를 보도한다. 방송사는 시청률을 원하고, 언론은 먹잇감을 필요로 하고, 연예인들은 노출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좀 더 깊은 인상을 남기기를 원하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이다. 워낙 경쟁적으로 여성 연예인들이 ‘살색 마케팅’에 동참하다 보니 ‘비키니 전쟁’이라는 표현마저 나왔다. TV 드라마의 수영복을 넘어 쇼핑몰을 비롯한 각종 광고와 화보촬영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더 아찔한 장면을 건지기 위해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미끈한 몸매를 가진 선남선녀들의 노출을 이용한 미디어의 마케팅 물량공세가 신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은 더 말해 무엇 하랴. 미디어, 특히 공중파를 통해 전시되는 몸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기준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는 지식인의 책 한권보다 무르팍 도사의 한 마디가 더 영향력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몸에 대한 매혹은 다이어트 산업과 성형으로 영역을 건너뛰며 구체적이면서도 빗나간 욕망들을 끊임없이 찍어내고 있다.

▲ 2008년 여름에 선보인 해피선데이의 '꼬꼬관광'ⓒKBS
재밌는 것은 노출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다. 각종 미디어들이 연에인의 노출에 대해 찬양일색인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특히 공중파 TV는 동네북이나 마찬가지다. 과도한 노출, 선정성 논란 등의 말들이 도마 위의 단골 메뉴로 오르내리고 여기에 각종 규제들이 끼어들면 점입가경이 된다. 공중파 스스로도 훈계조로 조금의 개선의 여지도, 의지도 없는 어색한 자기비판을 종종 수행한다. 자기모순적인 태도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 연예인들의 노출이 시청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노출을 통해 자신만의 판타지를 양껏 즐기는 이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환호하던 시청자들은 한 켠에서 역시나 방송의 상업성을 성토하고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여기에는 항상 가족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부모님과 함께 보는데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 ‘아이와 함께 보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더라’. 부모와도 볼 수 없고 아이와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역시, 좋은 건 혼자 봐야 맛인가 보다.

길지 않은 생을 살아오며 목격한 것 중 가장 ‘음란’했던 풍경은 청계천변의 성인비디오 판매점들이 청계천 복구와 함께 거리 뒤편으로 밀려나고 그 앞으로 커다란 건물이 들어선 장면이었다. 그 건물 1층에는 부동산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는데, 부동산 간판을 비껴 보이는 성인비디오 판매점의 모습이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공식적인 음란물을 판매하는 업소를 밀쳐내고 대로변에 재산증식의 노골적인 욕망을 보란 듯이 전시해놓은 부동산의 그 살벌한 풍경이 내겐 그렇게 남세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미디어에서 노출을 다루는 방식과 그 노출에 대한 반응들 역시 비슷하게 느껴진다. 공식적인 미디어에 드러나는 노출이 대단해봤자 음란물의 바다인 인터넷과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숱한 선정성 논란과 짐짓 헛기침을 하며 꾸짖는 목소리들, 방송-연예산업의 이해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상업적 활용과 그에 대한 낯 뜨겁고도 노골적인 찬양. 이들이 빚어내는 거대한 욕망의 도가니를 직시하노라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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