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이라는 이름이 문제가 되고 있다. 경남 통영에 지어지는 음악당 이름이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윤이상국제음악당으로, 다시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대로 윤이상(1917~1995)은 통영 출신으로 세계가 알아주는 현대 음악가다.

윤이상은 1956년 유럽으로 음악 유학을 가 독일에 정착했다. 1963년 북한을 찾아갔고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끌려 들어와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두 차례 감형을 거쳐 이태만에 석방된 뒤 독일로 나갔다.(또는 들어갔다.)

1981년 광주항쟁을 소재로 삼아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94년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 축제에 참석하려 했으나 우리 정부와 갈등 끝에 불발에 그쳤다. 이듬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동·서양을 훌륭하게 아우른 작곡가라는 평가가 드높다.

윤이상은, 이처럼 음악에서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이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민족을 중심에 놓고, 이념에 관계없이 조국을 사랑한 사람 정도라고 할까. 극우 수구 집단은 이 점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자기네 이념 쪽으로 윤이상이 기울어져 있지 않다는 점 말이다.

내가 알기로는 윤이상은 숨진 뒤에도 복권이 되지 못했다. 다만 2006년 1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1967년 동베를린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사건의 외연과 범죄 내용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힌 것이 전부다.

이런 가운데 윤이상의 고향 통영에서는 윤이상이 숨진 1995년 민간 차원에서 윤이상 추모회가 만들어졌으며 이를 중심으로 해서 1999년 윤이상 가곡의 밤이 열렸다. 이때만 해도 나라밖에서는 오래 전부터 세계 5대 음악가로 대접받던 윤이상이 나라 안 더 나아가 통영에서조차 ‘빨갱이’로 금기시되던 때였다.

그러다가 2000년은 통영현대음악제가 열려 이듬해까지 계속되는데 이때부터 통영시가 주체로 참여하는 등 행사 성격이 조금씩 달라졌다. 2002년에는 통영국제음악제로 이름을 갈아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윤이상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행사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하나뿐인데 그나마 2008년까지는 ‘경남국제음악콩쿠르’였다.

2002년에는 재단법인도 만들어졌다. 초대 이사장은 박성용 금호그룹(통영에는 금호마리나리조트가 있다) 당시 명예회장이 맡았다. 이를테면 행정기관과 재벌이 행사 운영의 주축이 된 것이다. 마산MBC 또한 2000년부터 중계방송 관여를 해 왔고. 과실은 당연히 그이들이 나눠 가졌을 것이다.

음악당을 짓는 애기는 2000년 어름부터 나왔다. 이름에 ‘윤이상’을 넣어야 한다는 얘기도 꾸준히 있어왔다. 통영에 음악당을 짓는 까닭이 통영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윤이상 덕분이라는 명분뿐 아니라, ‘윤이상’이 더 널리 알려져 있기에 브랜드 가치가 높다는 현실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2005년 경남도와 통영시가 음악당 건립을 국책 사업으로 추진하면서 ‘윤이상’을 쓰는 것으로 돼 있었다. ‘통영’국제음악당으로는 국책 사업으로 지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위의 발표가 나온 뒤에는 윤이상의 유족이 태도를 누그러뜨린 덕분도 있다.

이에 따라 경남도와 통영시는 문화관광부로부터 ‘윤이상 음악당’ 건립을 위해 기본 조사와 기본 설계 용역비 10억원을 받아 사업을 진행해 왔다. 2007년 9월 기본 조사는, 세계적인 음악당을 만들려면 기왕에 확보한 480억원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보고를 내놓았다.

▲ 윤이상 음악당 조감도
미국 월트디즈니콘서트홀 ㎡당 건축비가 1176만원이고 영국 세이지 게이츠헤드 ㎡당 건축비가 771만원인 데 견줘 윤이상 음악당은 ㎡당 392만원밖에 안 된다는 비교를 내놓으며 “국책사업 전환을 통한 1000억원 이상 사업비 확보”가 핵심과제라고 했다.

이에 진의장 통영시장은 2008년 11월 “국책사업으로 전환은 되지 않았지만” 절실하게 상대방을 설득해 김태호 경남도지사로부터 500억원,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500억원 모두 1000억원 예산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열성으로 뛰던 통영시장이 올 7월 들어 말을 바꿨다. 경남도와 중앙정부의 1000억원 예산 지원이 어렵다고 보고 포기하는 한편 음악당 이름에서도 ‘윤이상’을 빼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부나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어떤 외부 압력도 없었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반역 저지 국민 저항 운동의 사령탑’을 자임하는 ‘국민행동본부’라는 단체는 2008년 12월 17일 ‘좌파를 몰아내라고 뽑았더니’라는 성명을 내어 “좌우 동거 정권을 만든 이명박 정부는 역사의 죄인이 되려는가?” 물으며 “반역자 윤이상을 기리는 초호화판 음악당은 국민세금으로 지어주기로 하고”라 짚었다.

<조갑제 닷컴>의 조갑제도 올 1월 “국가 예산 1480억 원을 투입하는 건물에 ‘국가반역자’의 이름을 붙일 수 있나”라 물으며 “‘애국 운동의 단·중·장기 전략’ 행동방안 가운데 하나로 ‘윤이상 기념 음악당 건립 중지(또는 명칭 변경) 요구’”를 제시했다. 우연한 일치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원래 그런 인물이고 김태호 경남도지사가 원래 중심 없이 왔다갔다 하는 부류이며 진의장 통영시장이 나름 예술에 조예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치권 입김에 바로 고개 숙이는 보수 인물임은 이미 다 아는 바다. 그이들은 잇속이 빤하고 계산을 잘하는 무리다.

게다가 이른바 집토끼가 집을 나갈 조짐을 보인다 싶으면 여태 해놓은 말까지도 단숨에 뒤집을 줄 안다. 다른 사람이 다치든 말든 그런 데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인간들의 속성을 이번 뒷걸음질에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이들에게 예술이나 약속 따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저는 1963년 8월 경남 창녕에서 났습니다. 함양과 창녕과 부산과 대구와 서울을 돌며 자랐고 1986년 경남 마산과 창원에 발 붙였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는 1999년 들어왔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한 뒤에는 노동조합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일삼아 했습니다.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 9일까지 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을 했으며 2009년 1월 기자 직분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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