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운동이란 숨쉬기 운동이 고작이다. 최근 들어 점심 식사 후 두어시간 지나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하는 국민체조가 근래 시작한 운동이라고 한다면 나의 스포츠 이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응원이라도 열심히 해야 할 터이나, 어찌나 간덩이가 좁쌀만한지 두 손 불끈쥐고 숨죽이며 응원하는 ‘빅 경기’도 즐기지 못하는 소인배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승전보를 간절히 염원하며 짐짓 딴전 피우다 승리의 기운이 완연한 다음에야 슬며시 엉덩이를 들이밀거나, 것도 아니면 감동의 순간을 ‘리플레이’의 기쁨으로 재생산해서 뒤늦게 박수치는 엇박자의 썰렁한 세레머니를 연발, 앞서 탄식과 환호를 공유하던 사람들 일제히 뒤돌아보며 “뭐야?”하는 썰렁한 눈총 세례도 많이 받았으니 짐작컨대 내 명(命)은 ‘욕먹어’ 길게 살거라고 자부해본다. 이처럼 길게 고해성사를 늘어놓은 이유는 스포츠에 관심없던 내가 스포츠 영화에 감동먹은 덕분이다.

▲ 영화 '킹콩을 들다' 포스터.
영화 <우생순>이 있기 전 ‘핸드볼’이라는 구기종목이 그러하듯, ‘역도’라는 스포츠종목 또한 그리 친근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킹콩을 들다>라는 영화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솔직히 <킹콩을 들다>라는 영화역시 정보를 가지고 선택한 것은 아니고 어찌 상영관을 서성이다 시간이 맞아떨어져 별 기대없이 본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 보통 내공이 아니었다. 연발탄으로 웃음을 쏘아대더니 지루할 무렵 눈물세례와 코미디 번갈아 강타, 엔딩무렵 감동으로 오래 오래 자리를 일어서지 못하겠더란 말이다. 엔딩 크레딧을 보다가 이 영화가 정인영, 윤상윤, 김용철 선생님의 지도아래 2000년 전국체전에서 14개 금메달을 휩쓴 순창의 중고등학교 역도부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 정인영 선생님은 이듬해 뇌출혈로 작고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새로운 정보도 얻었지만 황당한 사실도 많이 발견했다. 확실한 것은 금메달 14개의 주인공이 전북 순창고등학교 학생들이라는 것, 그런데 일부 기사에서는 ‘시골 중’으로 대충 표기되거나 ‘전남 순창고’로 씌여진 일간지도 있었다. 촬영의 대부분이 보성에서 이뤄져서 그런지 보성중학교로 오인하는 사례도 있었다. 어쨌거나 ‘킹콩’으로 유발된 관심은 역도 명문의 기적을 추적해 보게 했다. 최소한 ‘킹콩’이 계속 회자되는 동안 ‘전남 순창’이라거나 ‘어느 시골학교’ 같은 사태는 막아보자는 지역 언론인으로서 소명감도 있었다.

▲ 순창북중 순창고등학교 정문앞. 전형적인 시골의 학교 앞 전경이 정겹다. 최근 역도대회에서 MVP에 선정된 서희엽 선수를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눈길을 끈다. ⓒ김사은 PD
전라북도 순창, 고추장으로 잘 알려진 이 곳은 인구 3만명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소규모 도시다. 순창북중, 순창고등학교는 같은 재단에 속한 사립학교다. 1991년 대학에서 역도를 전공한 윤상윤 교사 부임과 동시에 이 학교에 역도부를 창설하게 된다. 시골학교 역도부는 뻔하디 뻔한 상황이어서 먼지투성이 창고에서 변변한 기구도 없이 막대나 대나무로 연습을 해야 했고 시멘트 바닥이 깨지거나 파여 연습장도 확보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초창기 어려움을 겪다가 이 학교 선생님들이 매달 5천원씩 역도부 육성 자금으로 지원해줬고 순창군 유지들이 고기를 지원하는 등 꾸준한 관심과 지원속에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2년3월 순창북중학교에 이배영이라는 학생이 입학한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연약하고 왜소한 소년은 윤상윤감독의 눈에 띄었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던가! 윤 선생님의 권유로 역도부에 둥지를 튼 이배영은 소년체전 3관왕에 오르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난속에서도 아름다운 미소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배영이 바로 이 소년이었던 것이다.

▲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진안 마령중학교에서 역도부를 창설하고 역도 영웅 전병관을 발굴한 정인영 교사가 1994년 공립학교인 순창여중으로 부임, 4명의 선수와 함께 역도부를 창설했고 이미 역도연습장이 마련된 순창북중, 순창고등학교 역도부와 함께 훈련을 실시했다.

그로부터 6년 후 기적이 일어났다. 2000년 부산에서 열린 전국체전 역도부문에서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대회에 5명의 선수를 출전시킨 순창고등학교 역도부는 총15개의 금메달 중 14개를 차지했고 은메달 1개를 따냈다. (이 또한 동점이었으나 체중에서 밀려 은메달을 딴 것이라고 한다.) 4명이 3관왕에 올라 MVP가 됐고, 전국체전 사상 처음으로 단체에게 MVP도 수여됐다. 순창여중에서 탄탄한 기량을 쌓은 학생들이 순창고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 정인영, 윤상윤, 그리고 당시 코치로 활동했던 김용철(현 보성군 역도단 감독) 선생님이 함께 일군 승리이자 기적이다.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년 후 정인영 선생님은 아쉽게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전국체전 당시를 회고하며 윤상윤 선생님은 “세 사람이 열정과 패기로 이룬 성과였다”고 말한다. 정인영 선생님에 대해 “정말 훌륭하고 본받을 점이 많은 교육자였다”며 “주말에 익산집에 가는 것을 제외하곤 24시간을 학생을 위해 헌신하는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심지어 방학기간 교사들이 2~3일 여행가는 것 조차 ‘내가 자리를 비우면 학생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며 고사했다고 하니 영화 속 이지봉 선생님(이범수 역)의 희생정신을 그대로 옮겼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윤상윤 선생님은 ‘운동선수들이 실력없다는 말을 들으면 안된다’고 꼬박꼬박 정규수업을 받게 했다. 수업후 오후 5시에 연습장에 모여 연습이 무르익을 만하면 7시30분 군내버스 막차시간이 다가오는지라 항상 연습시간이 아쉬웠다는 것. 그 와중에 꾸준히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며 순창역도의 명성을 이어갔다.

▲ 영화 '킹콩을 들다' 스틸컷.
다시 영화 얘기. 영화속 이지봉 선생님(이범수 역)의 모델은 정인영, 윤상윤, 김용철 선생님의 이야기를 한 인물로 담아낸 것이다. 극중 선수들 중 박영자, 서여순, 이현정이란 이름은 실명이나 캐릭터를 살려 재미있게 재구성했다. 윤상윤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14개 금메달 신화의 주역인 서효순, 손지영 선수는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이현정 선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기귀순 선수는 울산시청 소속으로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인 영화배우 조안이 이 영화에서 박영자라는 이름의 선수로 나오는데, 박영자라는 선수도 궁금했다. 지난 2001년 전국체전 당시 전북체고의 박영자 선수는 48kg급에 출전해 3관왕에 올랐다. 이 선수 역시 순창여중 시절 정인영 감독의 지도를 받았고 전북체고로 진학해 여자 역도 유망주로 명성을 떨쳤다. 현재 순창군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영자 선수는 “전국체전 신화의 주인공들은 선배언니들인데 왜 제 이름이 주인공으로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다고 수줍게 웃었다. 박 선수 역시 중학시절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생활하며 역도를 했다고 한다. 한사람 한사람 선수들의 어려운 속사정을 알았던 정인영 선생님은 더욱더 선수들에게 애정을 쏟았고, 선수들은 그런 정인영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하니 선생님의 존재가 더욱 그립다.

▲ 순창북중고등학교 역도장 앞에서 박영자 선수와 윤상윤 선생님 ⓒ김사은 PD
역도 명문 순창의 명성은 계속될 것인가? 윤상윤 선생님은 이 질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예전과 같은 헝그리정신은 사라졌고, 공립학교인 순창여중은 체육교사의 전입 전출에 따라 해체된 상태이며, 선수들도 2000년 당시보다 절반 이상 줄었단다. 하지만 순창북중과 순창고 역도부를 중심으로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서 꾸준히 메달을 획득하고 있고 아직도 꿈나무들이 많다. 순창고 3학년인 서희엽 선수는 81회 전국역도선수권대회에서 대회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며 남자고등부 MVP를 받았다. 장래 꿈이 뭐냐는 질문에 ‘개그맨’이 되고 싶단다. ‘올림픽 금’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의외의 답변이었다. 순창북중에는 박무정 박무성 쌍둥이 형제가 있다. 소년체전에서 나란히 동메달을 차지한 이 소년들은 체계적인 역도 훈련을 받기 위해 면 단위에서 ‘역도명문’으로 유학(?)왔다. 그들은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역도를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다.

▲ 연습을 마친 순창중고등학교 역도부. 뒷줄 오른쪽부터 윤상윤 선생님과 아들 윤범석, 왼쪽 뒷줄 서희엽 앞줄 가운데 쌍둥이 박무정 박무성 선수. ⓒ김사은 PD
윤상윤 선생님의 장남으로 이 학교 출신 윤범석 선수또한 아버지이자 스승인 윤 선생님의 지도로 한체대에 진학, 국가대표와 지도자의 꿈을 키우고 있다.

<킹콩을 들다>라는 멋진 영화가 이왕 순창에서 촬영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개인적으로 아쉽고 섭섭하지만 그 영화 덕에 순창 역도의 맵고 깊은 맛을 알게 되어 고맙기도 하다. 이 영화를 계기로 비인기종목이라는 역도에 대한 인식도 바꾸고 역도 메카 ‘전라북도 순창’의 진면목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순창이 낳은 이배영 선수의 미소도 덤으로 기억해주시길.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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