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국정원이 나라 안팎에서 실시간으로 북한을 자극했다. 대통령은 ‘의혹이 일고 있다’고 했고, 국정원은 ‘추정된다’라고 했다.

국가의 원수와 정보기관이 동시에 다른 이슈를 두고 예측을 내놓은 건데, 파장이 만만치 않다. 북에 대한 얼마나 많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킬지, 그리고 다른 의제와 이슈에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지 지켜볼 일이다.

대통령의 권한 중 가장 막강한 것으로 의제설정권이란 게 있다.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권한이다. 국정조정권이나 긴급명령권 등 법률이 부여하는 권한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강력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그렇다. 내외신 할 것 없이 전파를 탔다. 의제 설정이란 게 반드시 사실관계를 동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의혹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특정한 의제로의 몰입을 유도할 수 있다. 그리고 의도하는 프레임의 설치가 이뤄진다.

▲ 조선일보 7월9일자 1면
의혹이 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우리는 유엔제재와 같은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이 적극적으로 대화에 응하도록 하고 있다. 제재의 목표는 북한이 국제사회로 나와 대화를 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874호의 이행을 기초로 북한의 개방을 압박하겠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대북지원금의 핵무기 개발비로의 전용 의혹을 제기한 것은 ‘대화와 타협’의 맥락보다 ‘자극과 협박’의 뉘앙스가 커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한에 대해 “가장 폐쇄된 나라의 지도자” “모든 나라가 개방화와 국제공조를 통해 발전하는데 북한은 완벽하게 폐쇄된, 우리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라는 소신도 밝혀 제대로 긁어놓았다.

그런데 대북지원금의 핵 개발비 전용 시비는 이명박 대통령의 고안물이 아니다.

2006년 10월 재경위 국감에서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은 국민의정부 이후 최소 30억 달러가 북에 지원되었고, 이 돈이 핵 개발비로 전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도 사실관계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럴 수 있다는 거였다.

당시 국방위 소속 송영선 한나라당 의원도 같은 의혹을 제기하며 “(북한의) 제2경제위원회가 운용하는 자금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크레디스 스위스 계좌 등 해외구좌에 보관하기 때문에 이를 막는 것은 금융제재와 PSI만으로 가능하다. 금융제재는 핵개발 진전을 억제하는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송영선 의원은 당시 북의 국방비 운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북한은 1991년 경제위기 전까지 국내총생산이 500억 달러에 이르렀으나, 이후 98년 200억 달러까지 감소됐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국내총생산 대비 실제 군사비는 13%에서 22.5%까지 확대됐다. 그리고 300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군사비 감축은 크지 않았다.”

여기서 북이 군사비로 GDP의 13%, 15%, 22.5%를 사용하는데 비해 남한이 GDP의 약 3%를 국방비로 쓰고 있다는 식으로 비교하곤 한다. 부적절하다. GDP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GDP 규모는 약 30배 차이가 난다. 가령 2006년 남북 당국이 제각기 발표한 국방비는 북한 4.7억 달러, 남한 225억 달러였다. 남한의 국방비 규모가 북한보다 약 50배가 크다.

송영선 의원의 말대로 북한은 고난의행군을 하면서도 군사력을 확대해왔다.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맞서 핵 자위권 등 군사력을 통한 자주권을 강조해왔다. 어디서 어떻게 마련해서든 군사비를 늘려가며 체제 유지와 국력 과시에 나설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평화의 가치에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북이 놓여있던 처지에서 본다면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한편 조선일보는 지난 10년간 현금 29억 달러, 현물 40억 달러 등 69억 달러를 지원했고, 이 액수는 북의 핵 개발자금의 두 배가 넘는다고 주장했다.(7월 7일 4면) -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1995년-2009년 3월까지 북에 지원한 무상지원액은 총 20억8333만 달러이다.(통일연구원) - 그러면서도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어떻게 확보하는지는 미스터리다”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계속해 “전문가들은 한국의 대북지원이 핵개발에 전용됐을 가능성을 우려해왔다. 정보 당국에선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 초기부터 지금까지 쏟아부은 자금이 26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한다”고 썼다.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대북지원은 대부분 쌀, 비료, 의료물품 등 현물로 이루어졌다. 북한이 현물을 팔아 돈을 마련해 핵무기 개발에 사용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확인되지 않는 전문가와 정보 당국으로부터 나온 ‘가능성’ ‘의혹’ ‘추정’일 뿐이다. 북한도 하나의 국가인데 국가의 국방예산의 규모와 대북지원으로 얻은 수입 규모를 비교하여 ‘전용론’을 펴는 건 대관절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폴란드에서 “의혹이 일고 있다”고 한 발언은 준비된 거라면 지능적인 의제 설정 플레이라 하겠고, 불쑥 튀어나온 거라면 자신도 모르게 ‘세뇌’당한 몹쓸 상태를 드러냈다고 하겠는데. 전후 맥락으로 미루어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추정된다.

추정된다

국정원은 이번 DDoS 공격의 배후로 북한과 그 추종세력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북한이 지난 1998년부터 한·미를 겨냥한 사이버전을 대비, 사이버전담부대인 ‘기술정찰조’를 운영했고, 현재 500~600명의 해킹 요원을 운용 중이라고 밝혔다.

정보위 간사인 박영선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 담당국장이 △6월16일 국방부의 ‘사이버 스톰’ 참여에 대해 북측이 ‘도발’이라고 반응한 점 △북측이 6월27일 조평통 성명을 통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발표한 점 △해킹 당한 사이트들이 대부분 보수 성향이라는 점을 북한 배후설의 근거로 들었다고 전했다.

북 또는 그 추종세력들이 이번 해킹의 주인공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국정원 담당국장이 밝힌 근거만으로는 ‘추정’이라 표현하는 것조차 소설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미국 IP로 확인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부분의 언론은 이번 해킹을 사이버테러로 규정하고, 사태의 파장과 정부의 대응에 주목했다. 정부는 비상에 걸렸다. 오늘 오후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이 주재하는 긴급차관회의가 열렸다. 정부와 관계기관의 대응이 전시에 가깝다. 국정원, 경찰청, 행안부, 한국정보보호진흥원, 통신사업자들이 대응에 나선 가운데, 합동참모본부는 공격자가 북한이라는 추정에 따라 인포콘5(평시준비태세)를 4(증가된 군사경계) 수준으로 격상하는 것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 의원 17인이 지난해 10월에 발의한 ‘국가사이버위기관리법’이 거론된다. 국정원이 사이버 공격의 정보 수집, 분석, 대책 마련 등을 종합 관리토록 한다는 것이 골자다. 대테러방지법과 사이버모욕죄 도입 등도 강조된다. 국가의 공권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의혹’ 국정원의 ‘추정’ 효과가 파격적이지는 않을 듯 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의제설정능력이란 역대 대통령 최저 수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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