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아이)돌’이라고 들어보셨는가? 어느날 TV를 보다 문득 그 자막을 보는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짐승이란다!” 역동적인 안무와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2PM이니 그 별칭이 전혀 어색하다고만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동물적인 환호가 아닌가 말이다.

짐승의 사전적 의미로 그 표현이 던진 충격을 환원해 들어가면 일단 ‘짐승’은 사람이 아닌 동물을 칭한다. 때때로 사람을 칭할 경우 잔인하거나 공격적인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 짐승이 사람을 일컬을 때는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도덕적 무엇이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짐승만도 못한 놈”은 패륜적인 상황을 연출한 인간 이하의 인간을 압축해야 하는 순간 빠지지 않는 문장이다.

짐승은 때로는 그 강도를 낮춰 ‘야수’와 유사한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더욱 약소하게는 ‘늑대’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짐승’이란 단어의 전통적 사용법은 극단적으로 음흉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남성성을 극대화하는 표현이었다. 예컨대, 마지막 배편이 떠나버린 어느 섬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민박집 잠자리에서 여자가 긋는 마지노선이었다. “이 선 넘어오면 짐승이다.”

그렇다. 일부 반어적인 영역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짐승’은 불편하고, 폭력적인 상황에 어울리는 부정적인 말의 대명사였다. 헌데 아이돌에게 ‘짐승'이라니.

‘짐승’은 최근 대중문화계에 신조어로 떠오른 단어이다. 얼핏 유추하건대, ‘육식남’의 확장 버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육식남’이 ‘초식남’에서 파생한 상대적 개념이라고 할 때, 오늘의 트렌드에서 가장 칭송받는 어떤 남성성에서 가장 멀리 있는 무리를 일컫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극과 극은 통한다지만.)

동시대의 ‘초식남’ VS ‘육식남’

▲ 세계일보 6월 26일자 '이명길의 연애공작소' 삽화 ⓒ 세계일보
2006년, 일본 칼럼니스트 후카자와 마키는 ‘U35 남자 마케팅 도감’을 통해 ‘초식남’이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하였다. 뭉뚱그려 설명하면 ‘초식남’은 육식계 동물처럼 남성다움을 강하게 어필하지 않으며, 주로 자신의 취미활동에 적극적이고, 자기애가 강하며, 이성과의 연애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남성을 일컫는다. 초식남을 명명한 후카사와 마키는 일본 사회에서 ‘초식남’이 늘어가는 현상과 이의 세대적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초식남은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시대에 태어나 경쟁과 성장에 대한 강박보다는 감성을 습득했고, 거기서 외화 되는 사회적 성공의 욕망보다는 자기애를 끄집어 낸 존재, 이탈적인 남성들이었다.

‘육식남’은 의미 그대로 ‘초식남’의 뒤집어진 전형이다. 온순함과 섬세함, 연약함을 동반하는 ‘초식남’과 달리 ‘육식남’은 자극적이고, 이기적이면서, 공격적이다. 그런 점에서 ‘육식남’은 몇 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나쁜 남자’의 후신인 듯도 싶다. 좀 더 비유를 들어보면, ‘초식남’이 칵테일을 즐겨먹는다면 ‘육식남’은 소맥정도는 가뿐히 넘기는 주량을 자랑한다. 초식남이 함께 아메리카노를 즐길 수 있는 여자 친구들에 만족하며 굳이 ‘애인’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육식남’은 여자 친구와의 ‘스킨십’을 기대하며 하룻밤을 꿈꾼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쯤 되면 알아챘을 테다. 그래, 이 두 부류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무의미한 짓이다. 애초 초식남이 던졌던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해석과 이들을 ‘신인류’로 호명했던 의미는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 강자 육식남을 퇴조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는 편이 옳다. 흔히, 샤이니는 ‘초식남’, 2PM은 ‘육식남’이라 분류되지만 다분히 개인적인 ‘색깔’의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두 부류는 동시대에 사이좋게 존재하고 있고 개인의 성향, 취미, 감수성 따위의 ‘호불호’로 평가될 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찌하여 2PM은 ‘육식남’의 자극적인 표본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나아가 ‘육식남’이라는 말로도 부족해, 그 뉘앙스를 120% 살린 ‘짐승’이라는 별칭까지 얻어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호명에 깔려 있는 ‘욕망’의 문제 말이다.

▲ '짐승아이돌'이라 불리는 가수 2PM ⓒ 2PM 홈페이지
누나들의 ‘욕망’, 짐승 ‘2PM’

아이돌의 무한경쟁 이후 소년들의 섹슈얼리티가 극대화되는 생존 게임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이돌이 ‘누나’들에게 ‘욕망’으로 호명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허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구조는 모두가 그럭저럭 행복할 순 있지만, 논리적으로 앞뒤가 조화롭지 못한 방식이다. 청소년/녀들의 동경의 대상이라 일컬어지는 ‘아이돌’에게 성적 욕망을 투영하고, 이젠 그들에게 전통적 의미의 ‘남성성’을 넘어 ‘짐승’이라며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꼰대’ 같은 발상이 아니라 아이돌을 둘러싼 전형적인 문법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이 그럭저럭 행복한 것과는 별개로 씁쓸한 것이다.

그래, 그래도 어쩌겠는가. 돌이켜 보면, 어째 여자의 변신만이 무죄겠는가. ‘아이돌’의 진화와 변신은 단선적 의미를 뛰어 넘어 사회적 욕망의 변모 전체와 관여하는 일이고, 그런 먹물적 분석을 떠나 아이돌의 다원화는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재미진 일이다. 관련하여 이종임 동국대 대중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돌이라는 상품의 소비층이 달라지고 있다. 소녀시대의 ‘삼촌’, 2PM을 바라보는 ‘누나’ 등 기성세대가 아이돌을 호명한다.”

따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90년대 소비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들은 이전의 기성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기성세대이다. 따라서 과거의 ‘꼰대’들마냥 권위적인 방식으로 청소년/녀들의 스타들에게 딴죽 걸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아이돌을 더욱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다. 단적으로 ‘샤이니’는 로망이고, '2PM'은 욕망이라고 부르고 있는 수준이다. 피겨요정 김연아의 팬덤이 스스로를 ‘승냥이’라 부르며 김연아에게 들이대는 것처럼 보다 자극적, 원초적, 그리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짐승’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조각도의 세모 칼로 파놓은 듯한 2PM의 가슴팍을 서슴없이 ‘짐승’으로 연결 지은 자막을 보던 후덜덜함에서 시작하여 초식남과 육식남 등 최근 대중문화계의 키워드까지 쫓다 보니 비록 산으로 가기 일보 직전이지만, 이제 결론이다. 혹자는 ‘초식남’이 아버지였던 ‘육식남’의 마초적 성향을 버렸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고, 혹자는 누가 뭐래도 남자는 ‘잡식성’이어야 한다며 초식남에 시기어린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90%의 미혼여성들은 ‘초식남’을 애인으로 꺼려한다는 여론조사도 발표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대중문화가 표상해내는 남성성이 다양해질수록 ‘한 남자’에 대한 합의는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점점 실타래가 엉켜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초식남과 육식남이 무대 위에서 만나 관절을 꺾는 비보이의 기능과 소울을 불러 제치는 싱어의 잡식성으로 변종되면서 바야흐로 우리는 ‘아이돌’의 짐승화라고 하는 해체적 언어, 인식적 충격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어찌되었건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눈화’들은 TV를 보며 인터넷을 뒤적이며 ‘짐승아이돌’을 찾아 헤맨다는 것, 그리고 ‘므흣’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들의 욕망은 ‘초식남’, ‘육식남’ 따위의 언어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불끈 솟아오르는 뭔가의 질펀함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돌로 집약되는 소비문화와 대중문화를 만끽해 온 세대적 감수성의 그/녀들의 욕망, 이 생성의 매커니즘이야말로 관찰의 대상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