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세상에 존재해줘서 고맙다는 OST도 마무리되고, 화장실에서 만난 소녀들은 서로 니가 울었네 왜 울었네 하며 여유로운 감상을 전한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모처럼 '감동'스럽게 눈물을 흘려 그런 소녀들의 감상에 함께 미소 지을 수 있었는데, 되돌아보면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불화했던 아버지와의 때늦었지만 그래도 더 늦지 않은 화해라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거기에 시한부 주인공의 인생 돌아보기라니 더더욱 익숙한 이야긴데, 무엇이 가슴을 울리게 만들었을까? 하늘 아래 새롭지 않은 '죽음'과 '가족', '친구', '연인' 이야기를 절묘하게 버무려낸 '가와무라 겐키'의 원작, 그리고 그 잔잔한 이야기를 블록버스터급으로 전개한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연출 덕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사물이 관계가 되는 시대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포스터

서른 살 우편배달부 나(사토 타케루분)는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도중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을 잃는다. 잠시 후 병원에서 그에게 내려진 건 뇌종양 판정, 설상가상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죽음의 선고'였다. 아직 자신의 죽음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나타난 또 다른 그. 죽음의 사자이거나 악마이거나 상관이 없다는 그는 나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씩을 없애겠다고 말한다.

영화의 구도는 흡사 <파우스트>에서, 노쇠한 늙은 학자 파우스트 앞에 나타나 젊음을 가지고 '딜'을 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같다. '욕망'이 봉쇄된 인간, 그 앞에 나타나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겠다는 악마. 언제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약하니, <고양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속 나도 냉큼 파슬리를 없애겠다면 '그'의 딜에 응답하자, 그런 나의 하찮은 요구와 달리 첫날 하루의 생명의 대가로 전화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은 영화 또 다음 날은 시계, 그리고 드디어 고양이를 없애려 한다.

왜 전화로부터 시작하여 영화, 시계 그리고 고양이였을까? 물론 영화 속 이들 '사물' 그리고 '동물'은 그저 '사물'이나 '동물'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왔던 증거들이다. 하지만 하고많은 증거 중에서 왜 저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영화 속 '나'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우편배달부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그가 스쳐가는 사무실 속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는 책상, 그리고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밖에 없다며 무심히 말하는 상사의 전화 통화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프리터' 족을 상징한다. 프리터족은 free arbeiter의 의 일본식 합성어로 장기 불황을 겪는 일본에서 이 일 저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사는 젊은 세대를 뜻한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 이미지

영화 속 나는 대학을 다녔고 영화를 좋아했던 청년이지만, 지금은 집을 나와 살며 우편배달부로 일한다. 그의 직업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의미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다. 강의실에서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걸 알아챈 눈 밝은 '나'로 인해 영화 이야기로 말문을 트게 된,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영화 속 대사로 대화를 나누는 친구 '타츠야' 역시 현실은 비디오점 직원인지 알바인지다. 여자친구라고 다를까? 그와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며 젊은 꿈을 다졌던 그녀의 현실은 극장 위층에 살며 영화를 걸고 표를 판매하는 극장 직원이다. 그들은 한때 어떤 꿈을 가졌을지 몰라도, 현실은 꿈을 발현하는 것이라 보기 힘든 존재로 살아간다.

그런 '프리터'족의 세대를 상징하는 물건이 휴대폰과 영화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굳이 '프리터'족이라는 조건을 걸지 않아도 현대의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물'이다. 우연히 잘못 걸려온 전화로 만나게 된 그녀, 하지만 그와 그녀가 제일 편한 건 '전화 속'에서이다. 그와 그녀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타츠야'의 매개가 된 건 '영화'. 하지만 여전히 타츠야와 츠타야를 헷갈리는 나처럼, 그들의 관계는 그다지 진전이 없거나 현실 속에서는 단절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 '단절'적이거나 '제한적' 관계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고립'적 삶을 무의식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하루를 보낸 그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건 돌아온 집에서 반기는 고양이 뿐. 개의 자리를 밀쳐내고 고양이가 가장 현대적인 애완동물이 된 이유는, 애착이 강한 무리동물 개와 달리 그 고독을 함께 기꺼이 감내해줄 성향의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물'로부터 '나의 역사', 그리고 존재를 복원하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 이미지

이렇게 영화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고립적'인 현대인의 소묘를 촘촘히 그려낸다. '사물'과 '동물'로 둘러싸인 고립적 삶, 소통 불능이 된 가족, 단절된 사랑 그리고 제한적 우정 등등. 그러니 시한부라는 선고를 받지 않았어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인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국가였던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급격한 산업화, 현대화 과정에서 '원자화'되어 겪게 되는 고통의 결과물로 '자살률' 1,2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툰다는 건 따지고 보면 이상한 점이 아니다. '사물'과 '동물'로만 채워진 삶에 대한 적나라한 후유증인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런 '고립된 개인'에 대한 적극적 변호를 대변한다. 제한적인 관계로 고립된 개인의 삶, 심지어 내일 죽는다 해도 자신이 기억될까 의심되는 삶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애쓴다. 그 정당성의 시작은 바로 나를 둘러싼 '사물'과 '동물'.

그래서 그저 '사물'이었던 전화는 되새겨 보니 이제는 '남'이 된, 한때 사랑했던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메신저로, 홀로 남은 시간을 때우던 한때 좋아했던 영화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우정의 표현으로, 그리고 '시계'와 '고양이'는 자신이 방기했던 '가족'을 복원시켜주는 매개체이자 상징물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 이미지

영화 속 매개체이자 상징물이 보여주는 것은 '퇴행적'이다. 과거의 연인, 한때 열렬했던 꿈, 해체된 가족,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조차 잊어버렸던 고립된 나. 하지만 그 '추억'을 영화는 '사물'을 통해 그리고 그 '사물'의 상실이란 블록버스터급 장치를 통해 현재의 나를 채우는 존재의 일부로 복원시킨다. 현재의 내가 '원자화'된 채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하더라도,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위로를 전한다. 설사 지금 현재의 네가 의미 없이 사라진다 해도, '역사'로 인해 너의 존재는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영화는 다독인다.

영화의 화법은 '퇴행'적이지만, 그 퇴행은 웅크리고 틀어박히는 퇴행이 아니라 죽음조차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퇴행이다. 결국 인간은 '의미'와 '관계'를 통해 존재를 설득당하는 바, 그것이 설사 현재가 아니라 해도, 지나온 인생의 아련한 추억의 한 토막이라 하더라도, 그 역사로 인해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것이라 <고양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은 역설적으로 말한다. '시한부'로 시작하지만 정작 영화가 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그 삶의 찬가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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