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빗소리에 얼핏 잠을 깼습니다. 밖은 아직 어둡습니다.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쉬지 않습니다. 잠결에도 쉬 그칠 비가 아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새벽부터 내린 비가 쉬지 않고 하루 종일 내립니다. 곳곳에서 물이 흐르고 계곡에선 천둥치듯 물소리가 나고 비구름은 하루 종일 산중턱에 걸려 누워있습니다.

잠시 비가 멈칫거리면 산 아래 깊은 계곡에서 흰 구름이 피어올라 산중턱 비구름과 만나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집니다. 해마다 장마는 찾아오지만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계곡에서 들리는 천둥소리, 산중턱에 걸린 비구름은 항상 새롭습니다.

▲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지리산
하루 종일 비 때문에 바깥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비 오는 옛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리면 아버지는 삽을 어깨에 올리고 빗속을 걸어 논으로 향합니다. 우산도 장화도 흔하지 않은 시절이라 고무신에 비를 맞으며 물꼬를 보러 나가십니다.

어린 우리들은 비가 오면 흐르는 작은 도랑을 흙으로 벽 만들어 막아놓고 호박 대 끊어 흙벽에 박아두면 호박대로 물이 흐르는 놀이를 열심히 했습니다. 장마가 길어지면 개구리 잡아 모래나 흙에 묻어 ‘해야 해야 잠꾸러기 해야 어서 어서 나와라. 김치국에 밥 말아먹고 어서 어서 나와라’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 물고랑 ⓒ지리산
그러고 보면 옛날엔 비가 지금처럼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께선 비가 내리면 ‘비님이 오신다’고 했고 누구 하나 비가 내린다고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비가 한 해 농사를 좌우하던 시절이라 그랬겠지요.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비를 손 내밀어 촉감 느끼는 놀이를 했고 어머니는 호박부침개를 하셨습니다. 비 때문에 낮게 깔린 공기를 타고 호박부침개 부치는 냄새가 얼마나 구수했던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은 비 떨어질 처마도, 흙도, 호박대도 없어져 비와 친해질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비는 나다니는데 불편할 뿐입니다. 이슬비든 보슬비든 여우비든 장대비든 소나기든 그냥 비일 뿐입니다.

▲ 호박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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