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대통령은 대통령인 모양이다. 꼴 보기도 싫지만 배짱 하나만은 두둑해 보인다. 물러나지 않겠다고 악착같이 버틴다. 나라를 통째로 담보로 잡고서 말이다. 이런 ‘배째라’ 초식의 희생양도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김병준씨가, 어제는 추미애 더민주 대표가 자해 대열에 합류했다.

추 대표의 뜬금없는 자해 시도는 더민주의 당론을 2선 후퇴에서 퇴진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의 배경에 야권 내 주도권 경쟁이 깔려있다는 분석도 있다. ‘개헌 폭탄’이 터질지가 관심거리로 등장하는 등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그런 흐름이 분명히 있는 듯하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14일 대통령이 새누리당 탈당하고 더민주, 국민의당, 새누리당 영수회담을 통해 총리를 합의하며 개헌을 통해 대통령선거를 치르자는 제안을 내놨다. 개헌이라는 명시적인 얘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하야를 촉구하며 나선 안철수 의원 쪽도 지난 13일 이와 비슷한 얘기를 꺼냈다.

박 위원장이 말한 ‘개헌’이 뭘까 생각해 봤다. 얼마 전 새누리당 친박 세력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야말로 개헌 필요성을 보여줬다’고 말하는 기가 찰 발상을 내놨다가 조롱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설마 권력구조 개편까지 포함하는 이런 ‘개헌’을 말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박 위원장이 설명하는 정치 일정이 실현된다고 해도, 새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조기대선 때까지 과도기를 맡는 과도내각일 뿐이다. 그런 과도내각에서 권력구조 개편까지 떠맡는다니 이건 좀 터무니없는 게 아닌가 싶다. 반푼이로 전락한 김병준씨가 ‘개헌’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한 것과 그리 다를 게 없다. 필요한 개헌이 있다면, 한인섭 서울대 교수가 예를 들어 지적하는 것처럼 “19대 대통령선거는 4월 15일 실시한다”는 조항 정도를 헌법 부칙에 넣는 것일 텐데 말이다. 야권 내 주도권 다툼을 위해 개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시도가 있다면 반드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돼 있다.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하는 개헌 논의는 조기대선 정국에서 시작하는 게 순리다. 매듭은 새롭게 창출된 권력 안에서 잡으면 된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왼쪽)와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연합뉴스)

그동안 나온 야권의 수습책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대통령은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팩트’다. 나라를 담보로 도박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야권의 최대 관심사는 ‘100만 시민 촛불의 요구’도 아닌 듯하다. ‘과연 권력의 개인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물어뜯을까? 물어뜯어 줬으면 좋겠는데!’에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대통령으로부터 받아낼 진술조서의 수준과 내용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다는 것이다.

기대는 접는 게 맞다. 대통령은 일찌감치 ‘최순실 개인 일탈’로 선을 그으며 잡아뗐다. 이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기 위해 민정수석으로 최재경 씨를 앉혔다. 진술조서의 수준과 내용이 어떨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탄핵소추의 근거를 여기에 기대려 했다면 상당한 오산이다.

나라를 담보로 안 물러나겠다고 버티는 대통령의 도박에 맞서 지금이야말로 정말 헌법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결연한 정치가 필요하다. 내가 야권이라면 어떻게 할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요구할 것이다. 많은 비난이 따르겠지만, 하야 이후에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겠다. 하야라는 면죄부를 발급하겠다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겠다. 내용은 이제부터 탄핵소추에 들어가겠으며, 탄핵 결정 때까지 정치 일정은 이러하며, 조기대선을 실시하기 위한 원포인트 개헌을 진행하며, 검찰은 한 점 의혹도 없이 철저히 수사해야 하며, 모든 국민과 공무원은 흔들림 없이 생업에 종사하며 탄핵 결정 때까지 주말마다 길고 힘들지만 국민주권을 되찾는 보람찬 저항에 나설 것을 당부하며, 탄핵소추 이후 결정 때까지 국가의 주요 현안들과 의제는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그리고 총리와 행정부 각료들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여야가 합의한 특검도 이런 맥락에 있어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지나친 내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나라가 담보로 잡혀있는 지금은 분명히 비상한 상황이다. 그에 걸맞는 비상하고 결연한 정치가 필요하다. 시민들은 야권에게서 그런 정치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물러날 생각도 없는 대통령에게 조기퇴진을 포함한 정치일정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정국 수습 방안이라고 내놓는 것은 너무 순진해 보인다. 단계적 접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여러 단계가 지나올 만큼 시간은 흘렀다.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는 것, 검찰이 주인을 끝까지 물어뜯지 않는 충성스러운 개임을 확인받기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리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트럼프랑 통화해!’라는 역풍을 맞긴 했지만, 호시탐탐 되치기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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