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양자회담 제안을 철회했다. 야권공조라는 대원칙을 깨면서 무리한 행보에 나선 것에 대한 비판이 당 내외로부터 쏟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리더십을 떠받치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 측이 양자회담에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면서 동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된 점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추미애 대표의 ‘깜짝 제안’은 애초 문재인 전 대표와 가까운 이들의 구상에 의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여의도 언저리에서 나왔다. 그러나 문재인 전 대표의 대변인 격 역할을 맡고 있는 김경수 의원은 양자회담 제안에 대해 “사전에 협의하거나 연락받은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혀 의문을 증폭시켰다. 당 지도부로서 추미애 대표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사람 중 하나여야 할 우상호 원내대표 역시 일종의 ‘통보’를 받았을 뿐 회담에 대한 사전 협의를 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14일 조선일보는 구(舊)민주계로 분류할 수 있는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 김민석 전 민주당 의원 라인이 작동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다만, 이후 의원총회 등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친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의원들이 추미애 대표를 옹호하고 나선 것을 볼 때 발단 자체는 추미애 대표의 ‘단독플레이’로 시작됐더라도 이후 과정에서 당내 주류 대 비주류 구도로 논쟁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추미애 대표의 양자회담은 ‘사고’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런 중요한 정치행보를 당 내에서 일정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 누구와도 상의를 하지 않고 발표했다는 사실은 이 사고의 책임을 추미애 대표 혼자서 뒤집어쓰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대목에선 추미애 대표의 과거 이력까지 언급된다. 취임 직후 전두환 예방을 언급했다가 반발에 부딪쳐 취소한 사례나 2009년 국회 환노위원장을 맡았을 당시 당론을 깨고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당원자격정지 2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사건 등이 회자되는 것이다. 결국 추미애 대표 특유의 ‘캐릭터’가 이 상황을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단지 이렇게만 보는 관점으로 과연 상황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바둑은 수만큼 수순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나쁜 수를 두더라도 이후에 어떤 수가 붙느냐에 따라 앞에 둔 수의 성격은 바뀔 수 있다. 정치도 비슷한 데가 있다. 추미애 대표가 양자회담을 제안한 것은 야권공조를 무너뜨리고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해 온 시민사회세력 등에게 ‘정치적 의심’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또 실질적으로 회담을 통해 얻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나쁜 수였다.

그러나 이후 행보를 제대로 했다면 이 수는 살아날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회담을 강행해 대통령의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고 어떤 관점으로 보더라도 퇴진 요구와 탄핵 추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대내외에 천명한 이후 당론을 전면 퇴진 요구로 전환하였다면 다소 간의 비판이 있었더라도 야권의 공조 분위기는 복원될 수 있었다. 결국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조직 전체의 차원에서 당내정치 실패가 수순을 엉키게 하고 정치적 사석(死石)을 만든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다수 의원들이 추미애 대표의 행보에 우려를 표한 것은 피부로 와 닿는 역풍의 세기가 만만찮았던 것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실에 지지자들이 항의전화를 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부정적 의견을 표출하는 사례가 많았다. 시민사회단체가 모여있는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14일 양자회담이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시켜줄 뿐이라며 이의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의해 단독회담을 하게 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1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결정에는 자칫 잘못하면 추미애 대표와의 양자회담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일정에 차질을 줄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한 걸로 보인다. 검찰은 15~16일 사이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방문조사를 실시하겠다는 이야기를 반복한 바 있다. 19일 정도에 최순실 씨를 기소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진행돼야 공소장에 박근혜 대통령의 범죄행위와 관련한 대목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순실 씨의 공소장에 법적 책임이 적시된다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형사처벌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헌법에 의해 현직 대통령은 형사소추가 금지돼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후 탄핵 국면에서 최순실 씨에 대한 공소장에 박근혜 대통령의 범죄행위가 기술되느냐 여부는 ‘탄핵사유’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양자회담 협의 이후 청와대는 이를 핑계로 검찰 수사를 해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15일 추미애 대표와의 회담이 진행되면 검찰 수사를 위한 준비를 할 시간이 부족하게 되고 그러면 검찰이 제시한 시한인 16일에도 방문조사에 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언론을 통해 흘린 것이다. 청와대가 이런 태도로 나오면서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청와대에 이용만 당해 박근혜 대통령의 시간만 벌어준다”는 여론의 압력이 증가한 걸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잠시 흔들렸지만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은 야권공조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물론 여전히 세부 쟁점에 대한 주장과 이해가 달라 앞으로도 이런 식의 주도권 다툼은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당분간 정국은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주장하는 ‘질서 있는 퇴진’을 향해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형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질서 있는 퇴진’이란 박근혜 대통령이 총괄적인 퇴진 일정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여야 합의로 과도내각을 구성하며 적절한 시점에 조기대선을 치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도내각을 어떻게 구성할지가 이후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누가 과도내각을 이끄는 국무총리가 되느냐에 따라서 ‘개헌’에 대한 입장차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14일 이후 일정에 ‘개헌’을 포함한 설명을 내놓았다. 더불어민주당 내에도 대선 이전에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추미애 대표의 양자회담 제안이 당내 개헌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라는 출처 불명의 정보가 여의도 근방을 돌아다닌 것도 사실이다.

야권의 주요 세력과 인물 중 이래저래 개헌에 부정적인 걸로 알려진 것은 문재인 전 대표 정도다. 차기 대권 가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언론의 해석이 전해지고 있으나, 개헌에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정확한 입장은 사실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개헌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면 이후 국면에서 추미애 대표의 양자회담 제안 해프닝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거국내각 또는 과도내각의 국무총리를 누구로 할 것인지, 이 사람이 갖는 개헌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에 따라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적 행보가 갈대처럼 흔들릴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사실 모범답안은 이미 존재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 단단한 기득권을 형성하는 사회적 구조 때문에 가능했다.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 내용의 개헌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분권형대통령제든 내각제든 마찬가지다. 정 개헌이 필요하다면 이의 요구를 아래로부터 만드는 것도 정치의 할 일이다. 개헌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사회적 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도록 할 수 있는가?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표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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