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풍’이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옛것으로 돌아가기’와 ‘최첨단의 유행 이끌기’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광년(光年) 단위의 거리감을 준다. 하지만 미리내를 사이에 두고 헤어져 있던 견우·직녀가 1년에 한 번씩 만나 사랑을 나누듯, 둘은 주기적으로 만나 설화 같은 현상을 빚어내고 다시 헤어진다. 만났다 헤어지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그 상대적인 절대성을 복고풍은 은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복고풍은 ‘낭만적 전위’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패션은 돌고 돈다’는 말은 온전한 명제가 아닐 것이다. (돌고 돌기만 해서야 패션 디자이너가 뭔 필요가 있겠는가.) 둘은 회귀, 순환에 갇혀 있다기 보다는 나선적으로 상승하거나 변증법적으로 진전할 것이다. 복고풍이 ‘갱신’의 동태성을 상실하면 그건 ‘퇴행’이다. 치매 걸린 노인이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정체’일 수도 있다. 멈춰 있는 시계가 하루 딱 두 번 시간이 맞는다고 멀쩡한 시계, 정확한 시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경향신문 6월30일자 여론면 ‘여적’의 <떡볶이 논쟁> 삽화
대한늬우스 방영과 떡볶이집 순례는 확실히 복고‘적’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둘의 작풍이 너무 닮았다 했는데, 역시 동일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둘에 차이가 있다면 작위와 부작위의 차이일 것이다. 대한늬우스가 의도적으로 복고의 ‘형식’을 빌려 입었다면, 떡볶이집 순례는 작가의 무의식적 감각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다. 정작 주목할 대목은 그런데도 작위와 부작위의 결과물에 아무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들을 읽어내는 열쇠다.

그의 작품은 복고‘적’이되 결코 복고‘풍’이 될 수 없다. 퇴행 또는 정체다. 대한늬우스 방영과 떡볶이집 순례는 복고와 퇴행이 현상적으로는 착시를 일으킬 만큼 매우 가깝다는, 그러나 실제로는 광년 단위의 극단적 대칭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옛것으로 돌아가기’와 ‘최첨단의 유행 이끌기’의 모순을 지양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는 그저 새마을운동의 70년대에 멈춰서 있고, 21세기 한국사회는 역류에 휩쓸려 그 시절로 거세게 퇴행 ‘당하고’ 있다.

평자의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보면, 그의 복고적인 형식은 퇴행적인 내용을 은폐하기 위한 교묘한 기획일 수도 있겠다 싶다. 본질적인 낙후성을 복고풍이 내뿜는 역설적 전위의 아우라에 무임승차시키는 고차방정식 말이다. 4대강 삽질의 후진 품성은 21세기에 담대하게 부활한 대한늬우스의 낭만성에 희석될 거라는 가설을 세웠을 거라고 상상하면 오싹한 재미가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명박산성과 차벽이라는 직설적 조형의 극한을 연출한 이가 아닌가.

평자의 상상력이 너무 앞서가면 그 자체가 하나의 키치적 상황으로 나타나게 된다. 포레스트 검프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달렸지만, 세상은 그 의미 없음에조차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과정에서 기획자는 없다. 대한늬우스 역시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서민’이라는 이름에서 ‘떡볶이집’의 조건반사를 일으키는 것처럼 4대강 삽질을 홍보하려니 대한늬우스의 기억이 자동격발된 것이다.

그의 떡볶이집 순례에 언론들은 일제히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그들도 안다. 가락동 새벽시장 박부자 할머니 때처럼 결코 감동의 이미지를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반복되는 클리셰는 우격다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뱉자니 아깝고 삼키자니 목에 걸릴 것 같은 계륵을 입에 물고 당면 가락을 입밖으로 늘어뜨리듯 어정쩡하게 말줄임표를 달 수밖에 없었다. 사단은 여의도에서 났다. 떡볶이집 아들까지 뛰어들어 벌이는 드잡이는 떡볶이(정확하게는 어묵)를 둘러싼 과도한 의미 집착이 빚어낸 키치적 풍경이다.

우리는 머잖아 언론관계법을 다룬 대한늬우스를 시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상파3사의 여론 독과점’에 짓눌린 채 무궁화호 오기만을 기다리는 서울역 대합실 서민들을 찾아가 위무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삽질부터 떠올리는 그는 언론과 미디어산업에서도 새마을정신을 읽어낸다. 잘 살아보기 위해 조중동과 재벌에게 방송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생각은 ‘멈춰있기에 딱 들어맞는’ 찰나를 한두 번 만날지도 모른다. 그는 퇴행과 정체의 전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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