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위협일까? 별다른 변화가 없을 거라는 진단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그렇다’에 가깝다. 이 위협은 그럼 박근혜 정권에 이득이 될까? 단기간을 놓고 본다면 그렇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트럼프의 승리는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박근혜 정권으로서는 일단 트럼프 당선으로 일어난 쇼크를 단기적 수습책의 일환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이 가시화된 9일에 일어난 일련의 일정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날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소집했다. 트럼프 시대가 한반도의 안보와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엽적인 지적일 수 있으나 각 부처의 비상대응체계가 가동돼 있는 상태에서 굳이 NSC 상임위가 열렸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만큼 엄중한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조치다.

이런 해석은 보수언론에서도 나온다. 조선일보는 10일 사설에서 “박 대통령과 친박이 행여 트럼프 쇼크를 위기 탈출의 기회로 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빨리 버려야 한다. 되지도 않을뿐더러 위기를 더 악성으로 심화시킬 수 있다”고 썼다. 중앙일보도 이날 사설에서 “혹시라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외적 도전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첫걸음은 ‘게이트’의 당사자인 박 대통령 스스로 2선 후퇴와 국정 이양 의사를 명확히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썼다. 박근혜 정권과 집권여당에서 트럼프 쇼크 때문에 안보와 경제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으니 청와대가 주장하는 방식을 따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1차적으로 마무리 짓자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보수언론도 인정하고 있다는 거다.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에서 자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한국의 미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트럼프 내각’의 대강을 보면 그렇다. 트럼프는 기성 정치권에 빚진 게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는 경선을 통해 공화당 후보가 되었지만 실제 공화당 내 주류는 그에게 거부감을 표하며 일정 정도 이상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화당 서열 1위라고들 하는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다. 그는 애초부터도 트럼프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적 막말이 문제가 된 이후엔 아예 지지를 거부하다시피 해왔다. 공화당의 주요 인사 중 그나마 당내의 영향력을 평가할 수 있을 만한 트럼프 측근은 라인스 프리버스 공화당 전국위 의장 정도다.

이 덕분에 트럼프는 전통적인 공화당의 아젠다에서 벗어나 상당한 정책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물론 국내의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대로 그간 트럼프가 언급해 온 파국적 형태의 외교 및 경제 공약들이 당장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떤 ‘결정적 순간’에 내려진 단 한 번의 판단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여기서 1997년 외환위기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당시 위기에 대해서는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를 미국이 사실상 방치하면서 한국까지 전염됐다는 해석이 다수설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동아시아 시장 개방을 위해 이 외환위기를 오히려 이용했다. 이때 재무장관을 맡았던 인사가 골드만삭스 출신의 로버트 루빈이고 차관으로서 김대중 당시 당선자를 면접해 검증했던 인사가 데이비드 립튼 현 IMF 수석부총재다. 이 두 사람은 당시 클린턴 행정부 내에서도 월스트리트의 논리에 가장 가까웠던 인사들로 평가된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로렌스 서머스나 티모시 가이트너 같은 사람들은 이들과 다르다. 오바마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활약한 티모시 가이트너는 당시에 동아시아 담당으로서 클린턴 행정부의 과도한 시장개방 압력에 반대하거나 소극적 입장을 유지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외환위기 직후 미 재무장관과 오바마 1기 행정부의 국가경제위 의장을 맡았던 로렌스 서머스는 2008년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다소 케인지안에 가까운 입장으로 후퇴했다.

트럼프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언급되는 이들은 앞서 언급한 로버트 루빈과 같은 사람들보다도 훨씬 금융의 논리에 익숙해 보인다. 금융이라는 것은 돈을 꿔줬을 때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트럼프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거론되는 인사들은 재벌, 기업 CEO, 펀드매니저, 헤지펀드 투자자 등의 직업을 갖고 있다. 단지 기업 출신이라는 것을 넘어 금융의 논리, 즉 월스트리트의 주장에 강하게 동조할 것이 분명한 이들이 동아시아를 휘감을 어떤 경제적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리라는 것은 마치 불을 보듯 뻔하다.

안보 문제도 마찬가지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북한과의 전쟁 직전까지 갈등 수위를 끌어올린 것은 김영삼 정권의 오락가락 행보와 중요 시점에서의 불필요한 대북강경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북한의 재협상 의사를 전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과 전면전을 반대하는 한국 정부의 읍소가 상황을 최악으로 가는 걸 막았다.

그러나 2016년 현재는 오히려 박근혜 정권이 일정 정도의 군사적 위협을 조성하는 데 적극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권의 대북강경책은 북한과 최소한의 협상 또는 대화를 할 수 있는 모든 창구를 막아버린 상태다. 미 당국자들의 북한에 대한 발언은 날을 거듭할수록 더 강력해지고 있다. 이는 1994년 위기의 ‘리메이크작’처럼 보이는데, 당시의 주연배우들은 김정일-김영삼-빌 클린턴이었으나 내년 초 개봉이 예상되는 이 작품의 출연진은 김정은-박근혜(최순실)-도널드 트럼프다. 상황은 분명히 더 악화됐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고립주의가 사드 배치 등의 문제를 고리로 해서 오히려 동아시아 정세에 숨을 틔워주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하지만, 이것 역시 현실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 공식적으로 한반도 내 사드 배치는 여전히 북한 핵미사일의 방어이지만 미-중 간의 관계에서는 중국 압박용이라는 맥락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맥락은 실제로 사드가 북한의 무수단 등 핵탄두미사일 또는 중국의 둥펑21D 등을 탐지하거나 방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는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추구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해왔고, 그에게 사드는 대중압박용 도구일 것이며, 사드 한반도 내 배치로 유무형의 이익을 얻을 미국 내 군수재벌 역시 그의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리라는 것이다.

이런 이중 삼중의 위기 속에서 최순실 씨가 없으면 아무것도 결정을 못하는 사람이 돼버린 박근혜 대통령으로는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을 도모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대통령이 외교 안보 군사적 권한을 모두 내려놓고 국회가 합의한 국무총리가 이를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위헌’ 논란이 일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현 상황을 헌법상에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는 ‘궐위나 사고’ 중 ‘사고’에 대항하는 걸로 해석하는 흐름도 있으나 여전히 이는 법학적 논란의 대상이다.

결국 트럼프 쇼크에 의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이 빨리 하야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고 이후 60일 내 선거를 치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도 탄생할 수 있다. 언제나 국익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결정적 순간에 국익을 또 다시 수호하는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필요하다. 오는 12일은 이 사태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