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점에서는 식상한 관용구를 쓸 수밖에 없다. 설마가 현실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결국 승리한 것에 전 세계가 놀랐다. 프랑스는 트럼프 당선을 예상하지 못해 아예 축전도 준비를 안 했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깜짝 놀랄 일인지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치도 않다.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이는 백인 중산층이 행복했던 시절을 가리키는 걸로 해석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보자면 1950~60년대와 로널드 레이건의 1980년대다. 물론 트럼프가 다른 모든 주제에 대해서도 불분명한 말들을 쏟아냈듯, 이 시대를 특정해서 자주 언급한 일은 없다. 그러나 회고적 감성은 트럼프가 자주 입에 올리는 막말들의 핵심인 인종주의, 여성혐오 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미국이 언젠가 위대했다는 전제는 현재의 미국이 위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미국이 위대하지 않게 된 이유는 쓸데없는 이념이나 이상 때문에 남의 나라 문제에 자주 간섭을 해왔기 때문이고, 마음씨 좋게도 남의 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선 남의 나라 일들엔 신경을 꺼야 하고 남의 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내쫓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기성 정치는 이러한 일을 하지 못했거나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트럼프의 이 논리는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뿐 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극우주의 정치의 그것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트럼프의 입장에선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모델을 가지고 와서 미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사업적 수완을 발휘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문제는 트럼프 그 자체가 아니라 ‘트럼프의 정치’를 요청하는 대중적 욕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힐러리 클린턴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여기서 또다시 정치적 냉소주의로 문제의식을 옮겨가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공격한 논리를 따져보면 그렇다. 트럼프는 클린턴을 ‘crooked Hillary’라고 반복해서 지칭했다. 이는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늙은 마녀’와 ‘사기꾼’을 합친 느낌의 용법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이 표현을 국민을 속이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나온 것이라는 전형적인 냉소주의적 규정에 여성혐오의 뉘앙스를 섞어 활용했다. 트럼프 캠프의 전략을 이 단어만큼 잘 나타낸 예도 없다.

우리가 기득권을 비난하기 위해 가장 간편하게 가져다 쓰는 표현은 ‘부패와 무능’이다. 무능하다면 의도라도 좋아야 하고, 의도가 나쁘다면 유능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둘 다 아니라는 거다. 트럼프가 클린턴을 공격한 논리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트럼프가 반복해서 클린턴의 건강 문제를 언급한 것은 ‘무능’, ‘이메일 게이트’를 공격한 것은 ‘부패’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한 것이다.

트럼프의 이런 공격은 FBI와 위키리크스의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선거 막판 FBI가 이메일 문제의 재수사를 언급한 것은 클린턴이 국민을 속였다는 인식에 더불어 무능하다는 믿음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됐다. 최측근인 후마 애버딘의 노트북에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과 연관된 이메일이 수천 건이나 발견된 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 것이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이메일 문제 역시 클린턴의 ‘무능’을 뒷받침하는 재료가 됐다. 클린턴 캠프의 주요 인사가 총책임자인 존 포데스타 선대본부장에게 “클린턴의 직관력이 형편없다는 점은 내가 잘 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는 거다.

이외에도 클린턴 재단의 불투명한 재정 문제 등 일련의 사건들 덕분에 클린턴은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 이라는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트럼프의 이런 공격이 대중적 파급력을 가진 것은 사람들이 클린턴을 ‘기성 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이미 그에게 ‘정치인은 명분과 이상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사익을 추구한다’(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그는 부패와 무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는 정치적 냉소주의의 규정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트럼프는 대중의 냉소주의에 대한 현실정치의 응답인 셈이다. 여기서 현실정치가 냉소주의에 응답하는 두 가지 양식을 볼 필요가 있다. 다소 편의적으로 단순화해보자면 현실정치는 ‘원래 정치란 없다’와 ‘진정한 정치는 존재하지만 지금 현실에 없다’는 두 형식으로 냉소주의에 응답한다.

트럼프의 경우는 ‘원래 정치란 없다’는 쪽이다. ‘정치’라는 개념의 모든 것은 허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의 영역에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것이다. 이게 트럼프가 인종주의와 소수자 혐오에 기댄 온갖 막말을 해댔어도 침몰하지 않은 핵심 이유다. 혐오에 대한 그의 급진성은 솔직함이라는, 즉 ‘대중을 속이기 위해 명분과 이상을 내세우지 않는’ 도착적 증거가 된다.

물론 그럼에도 이 급진성은 절대다수의 대중이 정치적으로 인준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를 무마할 수 있는 ‘기업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가 1987년 발간한 첫 자서전의 제목은 ‘The Art of the Deal’이다. 트럼프 내각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는 트럼프 지지선언을 할 때 그를 ‘the master of the art of the deal’이라고 지칭했다. 정치인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거래의 대가’는 승리를 위해 ‘오버’를 할 수도 있다. 이 점이 그가 가진 급진성을 미국 중산층이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핑계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 (연합뉴스)

미국인들이 트럼프와 같은 정치-문외한을 대통령으로 뽑았을 때 감당해야 할 리스크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우려하는 만큼은 아니었을 거다. 트럼프는 과거에도 정치인이 되는 것에 대한 열망을 종종 드러내왔고 미국인들은 이미 할리우드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한 경험이 있다.

노벨경제학상에 빛나는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트럼프의 당선을 두고 자신을 비롯한 클린턴 지지자들이 자기네 나라를 너무 몰랐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미국 사람도 모른다는 미국 정치에 대해 한국인들이 깊이 있게 논하는 것은 어려우나 적어도 어떤 교훈과 영감은 찾을 수 있는 문제인 것 같다.

트럼프가 ‘원래 정치는 없다’는 쪽이라면 2008년의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진정한 정치는 존재하지만 지금 현실에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이른바 ‘풀뿌리 혁명’의 주역이다. 클린턴과 치열한 경선을 치렀던 버니 샌더스도 이 분류 안에 들어간다. 이들은 ‘진정한 정치’를 규정하기 위해 ‘하면 안 되는 것’의 리스트를 여럿 만든다. 그래서 버니 샌더스는 30년 동안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자기 주장을 물리지 않았고 심지어 패션센스도 바꾸지 않았다. 반면 트럼프는 ‘안 될 게 뭐 있느냐’라고 하면서 ‘아무 말’을 한다. 이들과 달리 클린턴은 안타깝게도 2008년 오바마, 올해 샌더스 트럼프와의 경쟁 모두에서 ‘기성 정치인’에 집중되는 냉소적 규정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 구도를 한국으로 옮겨오면 어떨까? 정치혁명을 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진정한 정치는 존재하지만 지금 현실에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치란 원래 없다’에 더 가까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란 원래 없다’의 현실적 실천적 결론인 ‘공적 차원의 힘에 대한 추구’를 회고적으로 재구성한 존재에 가깝다. 어찌보면 한국 정치는 미국 정치를 오히려 앞질러 나가고 있다.

‘진정한 정치는 존재하지만 지금 현실에 없다’는 쪽이든 ‘정치란 원래 없다’는 쪽이든 정치적 냉소주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둘 다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정치는 아니다. 그러나 대중의 욕구가 둘 중 하나만을 바란다면 정치 전체를 부정하는 것보다는 어딘가에 진정한 정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게 조금이나마 바람직하다. 특히 현실정치와 대중의 욕구가 완전히 유리되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트럼프가 폴 라이언 하원의장 등 공화당 주류와 척을 져놓고서도 승리한 것은 이를 보여준다. 같은 딜레마가 ‘최순실 국정농단’ 터널을 (언젠가) 벗어난 우리를 덮칠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대와 미국의 트럼프식 정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정치인들이 냉소의 대상이 된 정치의 명분과 당위를 다시 되살려 이것으로 승부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둘째, 우리부터 정치를 나와는 다른 상품을 선택한 소비자들과의 경쟁으로 여기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셋째, 결론이 아니라 논리를 따지는 것에 정치적 논의의 역량을 훨씬 많이 투입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만일 미국 사회가 이런 일들을 이루었다면 반드시 클린턴이 승리했을 것이다. 그의 패배를 타산지석 삼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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