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목요일 KBS <이야기 발전소>의 한장면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반마다 한명씩 입담 좋은 애들이 꼭 한명씩 있었다. <주말의 영화>의 줄거리를 <주말의 영화>보다 더 재미나게 설명하는 친구도 있었고, 전날 버스에서 생긴일을 실감나게 들려줘서 쉬는 시간마다 주변에 친구들을 북적이게 하는 녀석도 꼭 있었다. TV로 치면 전자는 <출발! 비디오여행>을 진행한 셈이고, 후자는 <놀러와>나 <야심만만> 같은 토크쇼의 게스트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문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하이틴 로맨스 두루 독파하다가 스스로 집필하는 경지에 오른 여학생들이 꼭 한명씩 나타났고, 그 작품들은 주로 수업시간을 이용해 반 전체가 두루 돌려읽었다. 남학교에는 야설전문 작가들이 활약한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지금 그 친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그 친구들이 떠든다고 이름적던 반장이나, 학급 내 베스트셀러(?) 유혹을 뿌리치고 교과서에 파고들던 친구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에 가긴 갔다. 그때만 해도 그게 인과응보인줄 알았다.

KBS <이야기 발전소>는 세팀의 스토리텔러들이 출연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배틀을 벌였다. 8일 방송이 첫 번째 시간으로, 방청객과 전문가들의 평가점수를 종합해서 1등을 한 팀에게 창작 자금도 지원했다.

첫번째 팀은 가평의 '닫혀버린 문바위' 전설로 '유령의 집'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고, 두번째 팀은 현대판 우렁각시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세번째 팀은 '젊어지는 샘물'의 전설을 재해석했다.

즉, 완성된 작품으로 대결을 벌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만으로 벌이는 경쟁이다. 방송은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드라마로 재연해 보여줄 뿐이다.

<이야기 발전소>를 보며 시대를 잘 못타고 태어났던 수많은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 친구들을 향해 '에라이, 구라쟁이야'라고 핀잔을 주거나, 공부 안한다고 꾸중했을 뿐 누구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한때는 영화 한편 수출이 자동차 몇대를 판 것과 똑같다며 호들갑을 떨더니, 이제는 스토리가 대세인 모양이다. 영국의 마법사 소년 해리포터 시리즈가 영국 경제에 기여하는 돈을 따져보면 그럴만도 하다.

그렇다면 양질의 구라쟁이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때다. 자본도 없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제2의 해리포터를 쓰게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전국민을 심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애들은 정말 심심해서 방바닥을 긁고 또 긁다가 엄마, 아빠의 책을 한두권씩 몰래 읽으며 독서의 참 재미를 맛보게 해야 한다. 어른들도 과로를 법적으로 금지시켜 몸과 머리가 백지가 되는 순간을 자주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삶속에서 번쩍 하는 황홀한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한편, 8일 방송은 머리는 당연하고 피부도 꼭 쉬어야 한다는 새벽1시30분에 끝났다. 과연 구라꾼들은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걸까? 방송이 끝나고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채택된 내용 중 한편이 표절이라는 제보가 쏟아졌다. 괜히 대한민국의 희망이 보였다. 그런 감시자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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