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庶民). 마지막 왕조가 무너진 지 100년이 지난 민주공화국에서도 이 ‘왕조의 호명’은 여전히 널리 유통되고 있고, 특히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자신’과 ‘그들’의 교집합을 도들새김 하기 위해 깊이 애호하고 있다. ‘초심으로 돌아’ 갔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일성도 “친서민 정책”이었다. “내 스스로가 서민 출신 아닌가.” 그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거듭 강조했다.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당선됐고, 또 꾸준히 서민정책을 펼쳐왔지만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정부의 홍보 부족도 준열하게 질타했다.

비록 파편적 사실이지만, 그가 이른바 ‘서민 출신’인 것은 맞다. 하지만 홍보가 부족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부자 감세=서민 정책’이라는 홍보는 타당성과 설득력이 부족했을 뿐 양적으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명박=서민 출신’의 이미지 홍보는 그동안 차고도 넘쳤다. 대통령 후보 시절 낙원동 국밥집에서 압구정 욕쟁이 할머니와 찍은 선거 홍보물이나, 지난해 12월 새벽 서울 가락시장에서 노점상 할머니와 나눈 눈물의 포옹 장면 모두 그의 출신 성분을 환기시키기 위한 일련의 전략이었다. 그는 25일에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재래시장에서 어묵을 시식했다.

▲ 중앙일보 6월 26일자 1면.
‘출신 성분’의 시제는 언제나 과거형이다. 그러나 그의 출신 성분 마케팅은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가 지금도 서민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한때 서민이었던 그는 훨씬 오랫동안 자산가였고, 지금은 2년째 부자 대통령이다. 그의 출신 성분을 포착한 한 장의 스틸 사진 안에는 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린 그의 일대기까지 함께 담겨 있다. 그가 출신 성분을 끝없이 환기시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위상차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다. 이를 통해 지배권력도 출신 성분은 다르지 않고, 언젠가는 서민들도 자신처럼 될 수 있으며, 그래서 부자를 위한 정책도 ‘유예된 서민 정책’이라는 메시지가 구성된다.

그가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질책한 것도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 “과거엔 없는 사람들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을 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었지만 사교육 부담이 커지면서 점점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서민계층이 체감할 확실한 로드맵을 갖춘 사교육비 경감 방안 마련에 속도를 내라.” 이 말 속에서 서민은 하나의 정체성 속에서 연대하는 주체들이 아니라 ‘탈출’이라는 자기부정의 로망을 품은 분열된 타자의 집단으로 표상된다. 사교육 대책 같은 서민 정책이 ‘연어의 삶’을 제도화하는 전략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을 불사한 도전은 정작 회귀의 길인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연출은 언제나 엉성하다. 메시지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몰입과 동일시를 방해한다. 홍보가 부족한 게 아니다. 아무리 홍보를 해도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를 강부자 정부로 인식한다.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 비서관이 감옥에 들어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노골성의 효과를 지나치게 신봉하든가, 아니면 자신의 연출이 세련됐다고 믿을 만큼 둔하든가 둘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원인은 이명박 대통령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어쨌든 총감독이자 주연배우다.

그에게 출신 성분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전략적 소재이기 전에 반사적으로 되살아나는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환경미화원을 만나면 “나도 한때 환경미화원이었다”고 말하고, 노점상을 만나면 “나도 한때 노점상이었다”고 말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얘기할 땐 “나도 한때 비정규직이었다”로 말머리를 연다. 심지어 자신이 부리는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용산 철거민들에 대고도 “나도 한때 철거민이었다”고 했으니, 이쯤 되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깡통이 쏟아져 나오는 고장난 자판기다. 혹 그는 진짜로 믿는 게 아닐까, 자신이 아직도 서민이라고? ‘타당성’과 ‘진정성’이 언제나 동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 경향신문 6월 26일자 1면.
이명박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자수성가형’이다. 그는 이 네 음절의 한자어 가운데서도 앞의 ‘자수(自手)’ 두 음절에 더 몰입해 있는 것처럼 비친다. ‘회고’의 타임머신은 언제나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에 시곗바늘이 맞춰져 있다. 성공이라는 정박지보다는 성공으로 가는 거친 항로가 언제나 더 그립다. 한 노인이 후미진 재래시장 선술집에서 가끔 눈을 지그시 감아가며 혼자 대포 한 잔을 걸친 뒤 기사가 문을 열어주는 최고급 세단 뒷자리에 앉아 홀연히 사라지는 단막 드라마의 클리셰를 떠올려보라. 알고 보니 그 노인이 젊어서 그 시장에서 지게짐을 날랐다는….

자수성가형의 몸에 밴 습관은 성공 뒤에 취득된 게 아니라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에 내장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려서부터 교육과 더불어 ‘습관화된 중용’을 위한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낯간지런 표현보다는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의 메시지가 훨씬 명징하다.) 자수성가형에게는 가난을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어려서 겪었던 가난을 개인적으로 돌파할 때 들인 습관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가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 즉 ‘가난한 건 네 탓’이라는 동어반복을 습관화한다. ‘개인화’는 ‘획일화’와 역설적인 양면관계에 있다.

“이명박처럼 영리한 사람의 경험칙은 실무적으로 효과적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일정한 틀’을 중심으로 한 속도 중심의 문제해결 방식이므로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 떨어진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인간의 개별성에 관한 대목에 이르면 그의 디테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술해진다.…기업의 CEO나 서울시의 CEO나 경영의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디테일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다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일에 대한 인식은 ‘원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치열한 자기성찰조차도 원점에서 시작하지 않을 때는 ‘습관적 치열’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식의 습관적 성찰을 무기로 자신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무마시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2005년 펴낸 <사람 VS 사람>에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에 대해 분석한 내용의 일부다. 4년도 더 지난 분석이 오늘에도 적확하다면, 분석대상의 습관이 그대로라는 얘기다. ‘습관적 성찰’은 ‘세뇌된 기억’이다. 그의 개인적 성공 가도에서는 수많은 로드킬이 있었지만, 그의 기억에서는 그 생명의 스러져간 자취가 깨끗이 지워져 있다. 그의 초고속 질주를 뒷받침한 우연들과 뒤틀린 구조 또한 복구 불능 상태로 삭제되어 있다. 그가 재래시장에 갈 때마다, 서민을 입에 올릴 때마다, 그리고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할 때마다 그 자신에겐 습관적 성찰이, 진짜 서민들에게는 세뇌 작업이 되풀이된다.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는 건 모두에게 불행한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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