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은 동정이 아니라 감정의 수위맞춤이다

*스포일러 조금 있음

우리는 대부분 착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아니, 다수의 편에 서길 원한다. 다수가 개인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착하다’는 소리를 듣길 갈망한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인정받는 이들의 무리는 늘 서로를 다독이고 개인을 ‘착한 사람’으로 형상화해간다. 반면 ‘나쁜 사람’은 늘 소수다. 나쁜 사람은 개별적 욕망에만 충실할 뿐이다. 다수의 인정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 주변에 밀착돼있는 소수에게만 인정받으면 그만이다. 때로는 그 주변마저 배척하고 극단적으로 홀로서기도 한다. 다수는, 그런 개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말을 듣지 않는 꼴통’이 된다. 니체는 “선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선은 유전된다”고 했다. 착함과 나쁨은 그저 상대적일 뿐,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다.

▲ ⓒ <처음 만난 사람들> 공식 홈페이지
착한 사람들의 집단행동 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것이 바로 동정(同情)이다. 개인이 끔찍한 일을 당하면 그들은 어느덧 옆에 와 손을 꼭 잡는다. 아픔을 치유해준다며 집단에 소속되라 유혹한다. 우리는 보통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왜 내게만 이런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자신의 개별적 운명은 거부하고픈 대상이 된다. 이때 급격히 외로워진 개인은, 소속감과 주변의 동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집단이 추종하는 가치에 귀의하고, 고통을 준 개별적 운명을 망각하려 한다. 하지만 집단의 동정은 실재하는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 집단은 개인의 귀의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복속시켜 세를 불리는 도구로 사용할 뿐이고, 개인은 아픔의 이유를 잊은 채 집단의 연민과 동정을 아편삼아 자아를 그저 방임할 뿐이다. 집단 구성원은 사실, 개인의 아픔에 관심이 있어 그의 고통을 동정한다기보다, 그저 집단으로부터 ‘착한 인사이더’란 인정을 받기 위해 상처 입은 타인의 복속을 이용할 뿐이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동정할 때 근심스런 표정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척하지만, 그 연민의 가면 뒤에는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단 나았다고, 운명이 나에게는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다며 행복해하는 표정을 숨기고 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아이가 유괴살해당한 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동정심을 잘 드러내는 집단 중에 하나인 기독교에 귀의한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인들은 사실, 전도연의 아픔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전도연은 그저, 교회에는 십일조를 내어줄 세 불림의 도구였고, 교인들에게는 하나의 ‘어린 양’을 전도함으로써 기독교가 추구하는 ‘착함’의 가치를 얻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들이 추구하는 절대 가치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격언을 전도연에게 슬며시 압박한다. 전도연은 결국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의 얼굴을 직접 보고 ‘교리 최고의 가치’인 용서를 실천해보라는 교인들의 종용에 이끌려 범인을 면회했다가, 숨겨뒀던 고통의 상처가 되레 곪아터졌음을 깨닫고, 길게 오열한다. 집단은 그렇게 동정이란 위선으로 착.한.척.한 뒤, 집단에 계속 남아있는 개인에겐 ‘선’의 가치를 부여하고, 집단의 위선을 깨닫고 도피하는 개인에겐 ‘악’의 딱지를 붙인다.

▲ 영화 <처음 만난 사람들> 포스터
김동현 감독의 영화 <처음 만난 사람들>은 고통을 간직한 두 청년이 우연히 함께 동행하며 서로를 보듬는 과정을 담고 있다. 진욱(박인수)은 하나원에서 적응 훈련을 받고 막 자본주의 사회에 내던져진 탈북 청년. 이불을 사러 나왔다가 성냥갑 아파트들 사이에서 방향감각을 잃어 집조차 찾지 못하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현금입출금기 사용 방법도 모르고, 대형마트가 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그는, 보여준다. 그는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서, 애인을 찾으러 부안으로 가려다 버스를 잘못 탄 베트남 이주노동자 팅윤(꽝스)을 만난다. 한국말이라고는 ‘나도 인간입니다, 때리지 마세요’ 단 한 마디밖에 배우지 못한 무일푼의 팅윤이 안쓰러움과 동시에 같은 이방인인 자신의 미래이자 과거인 것만 같아, 그를 데리고 부안의 시골 마을에 함께 다다른다.

하지만 이미 애인은 국제결혼으로 팔려와 임신까지 했다. 절망한 팅윤은 내내 오열한다. 하지만 진욱은 우는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되레 “남자답지 못하다”며 여러 번 야단친다. 모텔에 앉아 맥주 컵에 소주를 채우던 진욱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팅윤과 건네지지 않는 대화를 나누며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터놓게 된다. 팅윤의 애인을 여동생이라고 착각한 진욱은 중국으로 팔려간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리며 꺼이꺼이 눈물을 쏟는다. 그걸 본 팅윤은 되레 진욱이 자신처럼 애인을 잃은 아픔을 가진 것으로 오해하고, 함께 얼싸안고 눈물을 쏟는다. 한 마디 말도 통하지 않는 둘은, 개별적으로 아파하는 이유도 정확히 모른 채 서로를 감싸 안고, 어느덧 자신의 아픔은 뒤로 미뤄둔 채 개별적인 두 가지의 고통에서, 하나의 교감체로 묶인다.

우리는 종종 타자의 고민을 듣고 조언할 때, 타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서 해주며 위로하는 척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개인의 아픔이란, 타인이 그걸 보듬어서 치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타인이 보듬는다고 해서 슬픔의 이유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건, 그래서 거짓말이다. 게다가 우리가 내뱉는, 슬퍼하는 타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는 것 역시 공감을 바탕으로 한 건 아니다. 그저, 고통을 겪으며 극도로 위축된 타자에게, 타자의 욕망에 상응하는 논리, 그래서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꺼내며 슬며시 동조해주면 체면치레 정도는 할 수 있기 때문에 아픔을 함께 느끼는 척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네 입장을 이해해, 힘내”란 말만 반복한다. 그렇게 우리는 위로하는 척하며, 고통으로 낮아진 타자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해.있.는. 나 자신을 우쭐해한다.

▲ ⓒ <처음 만난 사람들>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진욱과 팅윤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방식은 다르다. 진욱은 팅윤의 입장에서 그를 위로하지 않았고, 팅윤 역시 진욱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되레 고통에 억눌려있는 상대의 감정 수위에 눈금을 맞춰, 비슷한 수준으로 자신을 억눌렀던 고통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같은 수준의 ‘처절한’ 상태가 되어준다. ‘니가 슬플 때, 나는 니가 아프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만의 이유 때문에 동시에 슬플게’란 식이다. 자신을 낮추며 결국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의 교감을 시도한다. 이때 섣부른 동정의 위선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방식을 통해, 욕망의 박탈감에서 오는 개인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방법은, 나도 그 욕망함을 이루지 못한 ‘같은 신세의 존재’라는 걸, 그래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존재는 너만이 아니라 나도 있다는 걸, 그래서 니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하게 됐다. 위선적 공감으로 가득찬 집단의 동정과 값싼 아는 척으로 포장된 개인의 동정을 넘어선 진정한 교감은 그래서, 개별적 감정의 적절한 수위맞춤에서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내게 이 영화는 그렇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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