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들을 만나 거국내각 구성의 용의를 밝히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수행할) 총리 후보자를 추천하면 그대로 임명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김부겸 더민주 의원)

“대통령도 수사받고 처벌 감수하겠다는 눈물어린 반성과 사과, 그리고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관련자들의 진실규명과 처벌, 탈당 후 거국내각 구성만이 수습의 길이다.”(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말일 뿐이다. 말이 육신을 얻으려면 그만한 무게의 행동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능을 극대화시키는 실천의 의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말은 사후에(expost facto) 반드시 평가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말만 했지 네들이 실제로 뭘 했느냐?’ 이런 평가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개인적인 판단은 변함이 없다. 맞는 말을 육화시키기 위해 헌법이 부여한 자신의 권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은 여전히 ‘탄핵 소추’밖에 없다는 것이다. ‘순실이 상왕 사건’이 상징하는 국정 농단의 주범인 대통령을 2선으로 물러 앉히며 직무정지를 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대통령의 마지막 양심에 기대어 수사를 받고 처벌을 감수하겠으며 국회의 총리 후보자 추천을 그대로 임명하겠다고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웃기지 않는 말장난 ‘애드립’이다. 이미 현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국정농단을 주도한 '비선실세'로 주목된 최순실씨가 검찰에 긴급체포 돼 조사를 계속받고 있는 1일 오전 야당 원내대표들이 후속 대책 마련을 위해 국회에서 만나 발언하고 있다. (왼쪽 세 번째부터)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연합뉴스)

‘탄핵소추의 역풍에 대한 우려’는 그리 솔직하게 않게 다가온다. 더민주에선 ‘진짜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참여정부 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반성 여부가 당내 지도부 창출 선거의 여전한 주요 의제로 작동하던 모습을 봤던 터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을 견주면서 ‘순실이 상왕 사건’이 상징하는 국정 농단의 주범인 대통령을 옹호하는 사태를 뜻하는 ‘역풍’을 우려하는 것은 정말 온당치 않다. 오히려 탄핵 소추를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수세적인 태도를 보여온 야권이 걱정해야 할 역풍은 ‘말만 했지 네들이 뭐 했냐?’는 항변이다.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요구를 정치화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역풍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시간은 야권의 편이 아니다.

‘진우별존’(眞憂別存)인 듯하다. 진짜 걱정은 따로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 하나는 내년 12월 대선이라는 권력창출 일정의 변경이 낳는 부담감이다. 다른 하나는 탄핵 소추 과정에서 같은 심판의 대상이 될 세력이 심판자의 반열에 오르며 권력창출 경쟁에서 다크 호스로 떠오를 가능성에 대한 거부감이다. 이 둘은 한 사물의 두 측면처럼 뒤엉켜 있는 것 같다.

후자의 가능성, 분명히 있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정국에서 새누리당 전체가 한 방에 날아가는 효과를 보겠다는 게 야권의 정치적 계산이라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다. 함량 미달의 보수세력(이전에는 이들을 수구세력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청산, 이들에 기대어 호가호위를 누렸던 편승 세력의 약화, 편승 세력이 반성과 성찰 없이 꾀하는 정치적 변신 시도에 대한 꼼꼼한 검증과 비판, 이번 정국의 산물은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야권의 정치적 실력이나 정책적 실력이 뛰어나 지금의 여소야대 국면이 온 게 아니다. 가장 큰 공신은 오히려 현 정권의 실정이었다. 탄핵 소추의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분화하며 다크 호스로 떠오르는 세력이 있다면, 이들과 공정하게 권력창출 경쟁을 실력으로 벌이는 것은 야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들이 탄핵 소추에 동의한다고 해서 온전한 면죄부를 받는 건 아니다. 꼼꼼한 검증과 비판이라는 시험대를 그들이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명이 넘는 의원들이 탄핵 소추를 의결할 때 헌법재판소를 이를 마냥 무시할 수 있을까? 결정에 필요한 시간을 감안해도 늦어도 내년 1~2월에는 탄핵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헌재가 탄핵을 하지 않는 꼼수를 부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간단하다. 파국이다. 나라가 결딴나는 것이다. 탄핵 결정이 되면 조기 대선을 치르면 된다. 그때까지 시간이 남는다. 아마도, 국회에서 탄핵 소추가 이뤄질 때 비로소 ‘선거관리형 중립내각’(거국중립내각이 아니다!) 구성이 자연스러운 의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게 ‘순리’다.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인 조지 6세는 말더듬이었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그는 이에 의연히 맞서자는 라디오 연설을 훌륭히 해난다. 언어치료를 받는 각고의 노력 덕분이었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그런 그와 언어치료사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정권 초기 연설문 일부만 도움을 받았다는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방송이 녹화된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런 노력을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모두가 짐작하는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