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라시’가 정론이 되는 시대를 사는 건 슬픈 일이다. ‘지라시’에나 나올 얘기들이 진실로 밝혀지고 있다. 누구도 선출한 일이 없는 사인(私人)에 불과한 최순실 씨가 청와대로부터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국정 전반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는 거다. 그 중에는 민감한 외교안보사안도 있다. 이명박 정권이 북한의 국정을 지휘하는 국방위원회와 천안함 사건 이후에도 3차례나 접촉하였다는 극비사항까지 최순실 씨에게 넘어갔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이런 보도가 계속 나오는 것은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25일 해명이 거짓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최순실 씨의 역할을 ‘연설문과 홍보물’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는 어떤 기준을 놓고 봐도 최순실 씨의 역할이 그 이상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 중의 한 사람인 정호성 비서관이 두터운 보고 자료를 준비해 최순실 씨에게 전달했다는 구체적 증언까지 나오고 있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 응한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은 사실상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시를 내리는 구조나 다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들은 이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앞에 두고 그야말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조선일보 26일자 사설

보수세력의 충격도 엄청난 것 같다. 조선일보는 26일 지면에 <부끄럽다>라는 단 네 글자로 된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거국 내각이 아닌 거국 총리를 임명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주도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변한 것 같지도 않고 변할 리도 없으니 사실상 통치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리 그간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를 두고 청와대와 사생결단을 벌였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보수언론이 스스로 당선에 일조한 현직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게 과연 상상 가능한 일이었는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모습도 보인다. 중앙일보는 이날 김진 논설위원이 쓴 <아버지, 지지자, 국가에 상처를 준 박근혜>라는 제목의 칼럼을 지면에 실었다. 김진 논설위원의 이 글은 거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인격모독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진 논설위원은 그간 대통령이 숱한 비판을 받는 와중에도 최대한 박근혜 정권에 호의적인 스탠스에 서서 글을 써왔다. 물론 언론인이나 지식인이 한 번 정한 정치적 태도를 인생의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 글의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려 애쓴 이 중에서 ‘나라 걱정 같이 해보자’는 진득한 전화 한 통 받은 이가 거의 없다”는 대목은 김진 논설위원의 정치적 욕망과 좌절감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중앙일보 26일자 칼럼

우리는 이 신문들이 박근혜 정권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에는 정권의 정치적 기호를 맞추기 위하여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를 강하게 밀어붙인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혼외자식 논란으로 밀어냈고, 중앙일보는 2014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 때 정윤회 씨를 등장시켜 청와대를 감쌌다.

이제와서 한 번 더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신문들이 활약할 때 실질적 권력은 누구의 소유였냐는 것이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26일 “우리는 지금까지 최순실 정권에 살았다”고 발언했다. 이 비유를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이 맥락에서 보면 보수언론이 기생한 그 권력 역시 결국은 ‘최순실 권력’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야권과 새누리당 내 비박계는 특검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검찰의 행태를 볼 때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을지 의문이니 특검을 실시해 전모를 밝힐 수밖에 없겠다는 거다. 이를 가능케 하려면 대통령이 집권 여당을 탈당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온다. 만일 박근혜 대통령이 탈당하면 지금까지 집권 여당을 탈당하지 않은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 밖에 남지 않게 된다.

여러 가능성을 점쳐봐야 하겠으나 결국은 특검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위 수사를 하면서 우병우 민정수석의 지휘를 받고 그에게 보고까지 하는 검찰로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 비선 실세 의혹 수사를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은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이 의혹 때문에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이다. 특검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새누리당 내 의견이 모아지지 않는다면 아예 이번 기회에 보수세력발 정계개편이라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친박계 인사들은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실정법의 무엇을 위반하였는지 불분명하다는 주장을 슬그머니 흘리고 있다. 이를테면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을 대통령의 기밀누설이나 대통령기록물 유출과 같은 차원에서 다룰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소추는 금지돼있다. 어차피 임기가 끝난 이후에나 처벌할 수 있다는 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특검 실시와 이후 과정은 보수정권에 대한 분명한 정치적 평가의 기회가 돼야 한다. 역대 보수정권과 새누리당은 자신들을 통치에 유능하고 철저한 안보관을 갖춘 세력으로 치장해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지도자가 무능하며 통치에 대한 어떤 철학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근혜 대통령이 26일 청와대를 방문한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을 접견하기 위해 무궁화실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무책임과 무능은 자신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외치는 안보 문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만일 최순실 씨에게 전달됐다는 외교안보 관련 자료들이 보안이 담보되지 않는 외부로 유출되어 북한 공작원의 손에 넘어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최순실 씨의 컴퓨터 내부에 무슨 자료가 있었고 어떤 내용으로 돼있는지 연일 보도되는 이 상황 자체가 이런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보여준다. 국정을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자들이 참여정부 시기 대북인권결의안 표결 문제를 트집 잡는 건 그야말로 ‘몰상식’이다.

돌아보면 보수세력의 ‘능력’을 말하는 게 일종의 사치라는 생각도 든다. 능력을 논하기 이전에 오늘날 보수세력의 정체성은 민주공화정 자체에 맞지를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우리 헌법의 가장 윗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이 권력을 위임한 존재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권력을 위임받을만한 자질이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우리는 선거를 한다. 국민이 투표로서 현재의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은 이들이 그만한 능력을 갖췄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검증과 위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최순실 씨에게 사실상 통치를 맡겼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 참모들에 더해 실질적인 대통령이나 다름이 없었던 최순실 씨 역시 민주공화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돼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알 수 있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가 본인의 통치 능력을 믿지도 않는다는 거다. 본인의 능력을 본인이 믿지 못하니 참모들과 관료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게 아닐까 늘 의심하고, 형제를 포함한 주변 사람을 아무도 믿지 못하니 40년 간 ‘의리를 지킨’ 최순실 씨와 같은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법적 책임만이 아니다. 이런 아무 내용도 없는 사람을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로 포장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친 새누리당의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통치를 팔짱끼고 지켜본 관료들과 눈치 보기에만 급급했던 수사기관, 정보기관의 정치적 책임 역시 물어야 한다. 이들과 적극적으로 공생하며 자기 배를 불렸던 보수언론의 정치적 책임도 물어야 한다. 국민들은 ‘탄핵’과 ‘하야’를 인터넷 검색창에 써넣고 있다. 정치적으로 신의성실하지 않은 자들이 만든 정권의 통치를 이제는 그만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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