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순실이 상왕(上王) 사건’이 보도되는 날, 대통령은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며 거부하던 개헌 카드를 갑자기 꺼내들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직접 소명하시라’는 기자회견을 하며, 상왕 사건을 첫 보도한 방송사에서 건 확인 전화에 청와대의 그 누구도 받지 않았다는 말을 하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까지 했다. 밤새 몇 시간 동안 저 구중궁궐 안에서 무슨 일을 꾸몄는지 모르겠지만 꺼내든 패가 개헌이고 보면 ‘순실이 상왕 사건’을 덮기 위한 카드였다는 추정이 결코 허황한 소설만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블랙홀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작동하지 않았다. ‘1일 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여기에 동조하던 일부 정치인들만이 뭐 쫓던 새가 됐다. 이유야 어떻든 상왕 사건 물 타기에 보기 좋게 이용당한 꼴이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겠다고 앞으로 나서는 게 민망한 모양새다. 순실이가 ‘계엄’ 때리라고 했는데 잘못 알아들고 ‘개헌’ 카드 때린 게 아니냐는 웃고픈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누굴 탓하겠는가? 그 정도 감밖에 없다고 할밖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1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연합뉴스)

앞으로가 걱정이다. 작동하지 않는 블랙홀 앞에서 저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가늠하기 어려워서다. 이미 여러 차례 겪은 바 있기는 하지만 역시 떠오르는 건 남북 관계다. 북한 핵 미사일 문제로 사드 배치니 미국의 전술 핵무기 한반도 배치니 독자적 핵무장이니 하는 사안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북한에 대한 감정은 안 좋을 대로 안 좋은 상황이다. 미국의 전략 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해달라는 개념 상실의 얘기를 꺼냈다가 미국한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대당에 북한을 끼워 넣어달라고 앙탈을 부린 꼴이다. 나라 꼬락서니가 안팎에서 영 말이 아니다.

그래서 걱정이다. 대화는 없다는 기조 속에서 현 정부에서 찾아볼 수 남북 관계의 유일한 해법은 제재와 고립을 통한 북한 내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뿐이다. 현실화 여부를 떠나 과연 우리가 붕괴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 밖이다. 그러니,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경구가 머리를 맴돌며 떠나지 않는다. 백계가 다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결국 외부의 적을 만들고 이에 동조하는 제오열을 색출하자고 선동하는 것이다. 그렇다. 남북이 상당한 규모로 총질을 해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게 그것이다.

저들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로 토양은 비옥하다. 대통령은 김정은에 대해 ‘제 정신이 아니다’는 극언까지 한 상황이다. ‘북한 붕괴를 위해 중국이 나서라’는 주문을 걸고 있지만, ‘순망치한’인 북-중 관계를 바꿀 수 있는 마법을 부릴 것 같지는 않다. 개성 공단까지 폐쇄한 상황에서 대규모 국지전을 향하는 수순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대규모 총질까지 해대는 상황에서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 아무개씨가 극적인 반전을 이루는 시나리오가 여권 내부에서 그리는 시나리오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 여러 차례 예방 주사를 맞기는 했다. 북한이 때만 되면 총질을 해대며 기득권 세력의 정권 재창출에 기여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은 한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적대적 공생’은 남북 기득권 세력의 생리였다. 그러던 적대적 공생에 균열이 난 가장 최근의 사건은 천안함이었다. 접경지역의 시민들은 대결이 주지 못하는 현실을 체감했고 그것을 표로 드러냈다. 그렇게 천안함 사건의 효과는 당시 정권이 기대를 걸었던 것만 못 했다.

현실화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향후 남북이 대규모 총질을 하는 상황이 닥칠 경우 상황은 어떠할까? 북한이 핵 미사일을 개발한 상태에서 ‘반전평화’라는 가치가 이전만큼의 권위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예전에 누렸던 전략적 우위가 상실된 (한-미 동맹을 통한) 북한과의 ‘공포의 균형’ 상황에서 그나마 있었던 인심마저 더 박해지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반전평화는 버릴 수 없는 서민들의 깃발이다. 기억해 두자. 이미 탄저균이 상징하는 세균 무기는 한국의 동의 없이도 한반도의 주한미군이 스스로 들여왔다. 전술 핵무기는 우리들의 앙탈이 없어도 주한미군 스스로 알아서 들여올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다만, 사드를 배치하면 안 들여올 가능성이 높다는 말은 해두고 싶다. 전술 핵무기를 한반도에 굳이 들여올 필요성은 그만큼 낮아진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정권이 남북 간의 대규모 총질을 방조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반전평화 말고 하나가 더 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순실이 상왕 사건을 계기로 인구에 회자되는 말, 바로 ‘탄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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