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이길까, 최순실 씨의 ‘비선 실세 의혹’이 이길까. 25일 조간신문 1면의 형태를 상상하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형식적으론 개헌 얘기가 이겼는데, 내용적으론 역시 최순실의 승리다. 24일 저녁 JTBC가 보도한 연설문 수정 검토 의혹 때문이다.

JTBC는 이전에도 최순실 씨의 측근과 전 미르재단 관계자의 말을 빌어 최순실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수정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24일 JTBC는 이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내 공개했다. 최순실 씨가 사용한 컴퓨터에서 대통령의 연설문과 회의자료 등이 수정된 채 발견됐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누군가가 최순실 씨에게 연설문을 전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최순실 씨가 이를 수정해 다시 대통령에게 전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25일 사설에서 “해괴한 것은 이 놀라운 보도에 대해 청와대가 3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관계자들 전화는 꺼져 있거나 응답이 없었다. 이 경우 통상적으로 보도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청와대도 잘 알 것이다”라면서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에 대해 박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 설명해야 한다”고 썼다.

조선일보 25일자 사설

집권 여당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이날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사소한 메모 한 장이라도 밖으로 새나가서는 안되는 청와대 문건들이 무더기로 청와대 밖 한 자연인에게 넘어갔다는 뉴스를 보고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청와대 사람들 누구도 사실 확인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보도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라고 발언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또 “언론 보도에 제기된 문제가 모두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께서 국민들에게 직접 소명하시고 입장을 밝히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금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라. 이른바 비선실세라는 최순실의 계획적이고 부도덕한 호가호위, 치부행위를 사전 예방 못한 책임이 민정수석에게 있다. 청와대 보안을 지키고 청와대 직원의 공직기강을 바로세울 책임 역시 민정수석에 있다”고도 주장했다. 지속적인 의혹 제기에 대해 ‘증거가 없지 않느냐’라며 버티던 청와대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쉽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JTBC가 입수했다는 최순실 씨의 컴퓨터에 무슨 자료가 어떤 형태로 더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이른바 ‘말씀자료’ 등 연설문은 대통령 본인이 직접 유출하거나 이를 승인하지 않은 한 청와대 밖으로 나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돕는 참모는 연설기록비서관이다. 연설문을 고쳐준 사람이 문호(文豪)로 평가될 정도의 사람이었더라도 청와대 내부인사가 아니면 당연히 문제가 된다. 최순실 씨의 문장력은 공식적으로 검증된 바도 없고 이와 관련된 공적 이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당연한 얘기지만 최순실 씨의 역할은 기술적인 것에 한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최순실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수시로 고쳤다는 것은 그가 세간의 의혹대로 ‘비선실세’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이제 우리는 ‘통일 대박’, ‘바쁜 벌꿀’ 등의 전문가답지 못한 표현이나 ‘하얼빈 감옥’, ‘울워스의 쥐덫’ 등의 부정확한 표현이 왜 대통령의 연설문에 등장하였는지, 이런 표현들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던 당시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이 그만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박근혜 정권의 '비선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 씨 (뉴스타파 화면 캡처)

2014년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 당시 이에 연루된 박관천 경정이 우리나라 권력 1위는 최순실 씨고 2위는 정윤회 씨이며 3위는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말하였다는데, 실제로 그랬던 걸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2014년의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에서 불거진 의혹 역시 상당 부분 사실로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당시 사건의 내용은 정윤회 씨가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10여명의 청와대 참모들과 수시로 모임을 가지며 대통령의 민감한 결정 내용에 개입한다는 거였다. 비록 수사당국은 근거가 없는 얘기로 결론을 내렸으나,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는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정윤회, 최순실 부부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지 않은 권력을 휘둘러 나라를 다스렸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 엄청난 의혹 제기에 대해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21일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선출된 지도자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합법적으로 활용하는 게 민주공화국 통치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봉건시대에나 있을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가 제출됐다. 문학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이제 우리는 박근혜 시대를 봉건왕조시대로 부르는 것에 어떤 윤리적 저항감도 가지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런 판국에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하니 ‘국면전환용’이라는 평가 이상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세간에는 이대로라면 새로운 헌법의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봉건왕조국가다’가 되어야 한다는 농담도 나돌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최순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란다. 네티즌들은 이런 판국에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야권의 정치인이 있다면 그야말로 배신이라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개헌은 일반적인 정치 문법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대통령이 언젠가 말한 것처럼 개헌 논의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우리 정치의 기본을 규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치열한 논쟁과 수준 높은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야 할 문제이며, 실제 정치권은 개헌에 대한 장기간의 논의를 거쳐왔다.

그러나 대통령이 최순실 씨 문제에 대한 어떤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면서 최순실 블랙홀이 개헌 블랙홀을 오히려 빨아들이는 모양새가 됐다. 이는 장기적으로 정치에 대한 인식과 논의에 악영향을 끼친다. 최순실 씨 문제는 치열한 논쟁과 수준 높은 토론이 아닌 철저한 수사와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최순실 블랙홀’은 정치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정치적 조롱과 엄벌 요구로 대체하는 부정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새누리당 김용태 의원이 25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순실 의혹과 관련해 특검을 촉구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식적으로 보면 벌써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하고 거국내각을 꾸려 통치력의 유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어야 한다. 대통령이 무슨 발언만 하면 연합뉴스 등의 언론은 ‘정면돌파’라고 쓰는데, 더 이상 무슨 정면돌파 같은 것을 말할 문제가 아니다. 이번 의혹에 대한 특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야당 뿐만이 아니라 여당에서도 나오고 있다. 차라리 ‘하야’하라는 얘기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석고대죄하고 하야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개 민간인이 대통령의 연설문과 인사내역을 사전에 받아보았다는 이 현실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라고 썼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의혹이 불거지면 이후 등장할 정권의 성격과 전망에 대한 논의는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야’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지금 분위기는 마치 혁명 전야 같다. 이 난리통 후에 오는 권력의 성격이 레닌의 볼셰비키인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인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가 오더라도 국민은 환호할 것이다. 장면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당시 지식인들이 5·16 쿠데타를 묵인하고,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실망으로 박근혜 정권이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이 직접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혹 제기 중에 이 정도의 근거가 제시된 사례가 몇이나 있는가.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 밖에 국정 운영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고 야당의 모든 의혹 제기를 ‘대선 불복’으로 규정한 새누리당이 이러고도 다시 정권을 잡는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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