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한 초등학교 야구부에서 구타사건이 발생했다. 야구부 코치가 어린 아이들을 야구방망이로 때린 것이었다. 때린 이유는 간단했다. 전지훈련 가서 했던 연습시합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그 벌로 선수들은 그날 밤 숙소 밖으로 불려나와 주전선수는 20대, 비(非)주전선수는 일곱 대 가량을 맞았다고 한다. 그 중 여섯 명이 학교를 그만두고 전학을 가야 했고, 두 명은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제 갓 12살 쯤 된 초등학생들을 야구방망이로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린 사람. 그 정신상태가 궁금할 뿐이다.

언뜻 보면, 이 사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때린 ‘지도자’이다. 물론, 맞다. 일단은 때린 놈이 1차 책임을 가진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운동부 내부에서의 지도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침묵하는 학교당국도 문제였다. 뿐인가? 사건을 크게 키우지 않으려 했던 교육청의 늑장 대응도 문제라 하겠다. 실제로 이번 사건에 있어 이러한 침묵과 늑장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이 학교는 1차 폭행 발생(1월)이 있었던 후 3개월이 지나고서야 겨우 교육청에 보고했으며, 2차 폭행이 있었던 4월에는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사건을 감추려고만 했던 것이었다.

학교 측은 “오는 6월 야구대회를 앞두고 지도자를 교체하면 훈련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며 “일부 학부모들은 이들을 유임시켜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이러고보니 이들 학부모들도 문제다. 이들의 심리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내 자식만 괜찮으면 된다, 뭐 이건가? 구타 소식을 듣고도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쉬쉬했다는데, 이거, 같은 부모로서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

학교로부터 구타 사건을 보고받은 교육청 역시 잘못이 있다. 실제로 노컷뉴스의 한 기자와 지난 6월2일 통화했던 대전시 서부교육청 관계자는 “그런 사항을 보고받은 적 없다”고 답변했다가 3일 “3~4월쯤에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한다. 물론, 진짜 기억이 안 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문제는 사후관리가 아닐까 한다. 학교장에게 알아서 조치하라고 한 후, 그 이후의 보고가 없어 그냥 넘어갔다는데, 이거, 일선학교의 관리가 목적인 교육청에게 있어 일종의 ‘업무소홀’ 아닌가?

결국 지도자, 학부모, 학교, 교육청의 ‘구타유발자 4인방’ 때문에 애꿎은 야구꿈나무들이 야구뿐 아니라 학교도 그만두고, 정신과 치료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때린 놈? 알고도 가만있던 놈? 더 때리라고 부추긴 놈? 될대로 되라고 방관한 놈? 물어도 답이 없는 질문인 듯싶다. 비록, 때렸던 코치가 잘리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이 사건이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아직까지도 공공연한 비밀처럼 지도자의 운동선수 구타가 자행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손쉽게 선수들에게 손을 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기 때문일까.

▲ 노컷뉴스 6월 4일자 기사 화면 캡처.
맞아야 사람된다?!

#1. 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한참 후의 일이다. 대학교 다니면서 맞은 기억이 하도 많아서 절대로 애들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나에게, 교무실에서 잘못을 한 한 학생을 ‘말로만’ 지도하고 교실로 들여보내니, 한 선배 교사가 나에게 툭 말을 건네더라. “남 선생, 그러면 애들 버릇만 나빠져”라고. “무슨 말씀이신지”라고 물었더니, “왜 그래, 다 알면서”라고 답하시더라. 그러면서 이어지는 일장연설.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참고로, 이 분, 남자고등학교에서만 15년을 계시다 여고로 오셨다.

“매년 스승의 날이나 기념일 때 날 찾아오는 애들은 다 학교 다닐 때 뒤지게 맞은 애들이야. 애들은 그걸 고마워하지. 사람 만들어준 거 말야. 애들은 맞아야 정신차린다니까.”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애들은 맞아야 하는 존재”이다. 왜?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2. 다니던 여고에 운동부가 하나 있었다. 볼링부였다. 총 다섯 명의 애들로 구성된 이 ‘신생팀’의 감독은 선배형이 맡았고, 코치 역시 남자였다. 한 번은 동료 선생님들과 애들 볼링연습을 볼 겸, 볼링도 칠 겸, 연습하고 있는 볼링장을 찾았다. 문을 들어서는데 저 멀리서부터 둔탁한 소리가 나기에, 뭔가 했더니 여자애들이 엎드려뻗쳐 상태로 각목세례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코치가 나보다 선배라 뭐라 못하고 있었는데, 구타(!)가 다 끝나고 커피 한 잔 하면서 살짝 물어봤다. “안 때리고 말로 하면 안 되는거냐”고. 매우 정중하게 말이다. 돌아오는 말이 걸작이었다.

“얘네들은 엘리트 선수야. 그냥 재미로 운동하는 애들이 아니라고. 이런 애들은 맞으면서 운동해야지. 운동부 맡아본 적 없지? 안 해봤으면 몰라.”

요약해보면, “얘들도 맞아야 하는 존재”다. 왜? 진짜 운동선수가 되어야 하니까.

이상한 습속

▲ SBS 8시뉴스 2008년 11월 19일자 화면 캡처.
참으로 안타까운 점 중 하나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 중 다수가 ‘맞아야 사람된다’라는 심리적 도식을 너무 쉽게 체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운동부의 코치나 감독뿐 아니라 일선 학교 현장의 많은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애들은 맞아서 정신을 번쩍 차려야 공부도 하고, 나중에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과감하게 매도 들 줄 알아야만 진정한 교사가 된다는 식의 그런 논리를 이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교사뿐 아니라, 선수들에게 쉽게 매를 드는 지도자들도 사실, 이러한 논리를 과감하게 표현하고, 직접 실천한다. 즉, “애들은 엘리트 선수이기 때문에 맞아야 정신차린다”라고. 흔히들 국산제품은 때려야 한다는 것처럼, ‘국산’ 선수들 역시 선진국과 같은 과학적 훈련방법에 의한 것이 아닌 ‘몸으로, 깡으로’ 맞고, 구르고, 얻어 터져야 ‘진짜 선수’가 되고, ‘기대하는 성적’을 낸다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 지도자의 절대 다수가 지도방식에 있어 선진화된 과학적 훈련방법을 적용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 즉 노하우에 의존해 선수들을 가르치게 된다. “직접경험”보다 좋은 것은 없지만, 그 경험이 잘못된 것일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령, ‘맞아야 정신차린다’라는 경험의 경우엔 더더욱 말이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맞은 선수들은 자신이 체벌을 경험한 것을 적극적으로 체화하면서 이를 하나의 자산으로 간직한다. 어떤 자산인가? 바로 나중에 행여나 누군가를 가르칠 때 필요한 ‘교수방법’의 한 자산으로 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언급했던 ‘체화된 자본’으로서, 자신의 몸에 체벌의 상처와 그 효과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그거 내가 다 해봤다”라는, 경험에서 우러난 ‘폭력의 논리’처럼, 운동부 지도자들 역시, “내가 다 맞아봤다, 그거 효과 좋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가르치는 선수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그 무엇 -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면서 - 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사한다. 자기도 그걸 경험하고 이 정도로 성장했으니, 이 선수도 그렇게 되리란 강한 믿음과 더불어.

한 연구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스포츠 지도자들 80%가 선수시절 구타 수준의 체벌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이들에게 ‘선수들에게 체벌을 가하십니까’라고 물으니 25%만이 체벌을 한다고 말했고, 그들에게 지도를 받는 선수들의 경우 ‘지도자에게 체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85%가 체벌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60% 정도의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과연 이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한 것인지. 물론, 선수들의 말만 믿는 것도 균형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지도자들에게 체벌이 가장 유용한 지도수단이 된 건 사실이다. 즉각적인 반응과 그 결과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경험하면서 느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너도 나처럼 훌륭하게 자라다오”를 주문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게 체화된 습속이다.

체벌만큼 그 지속력이 약한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가해지는 동기가 모든 동기의 종류 중 가장 저조한 지속력을 담보하는데, 스포츠에서의 지도자들은 상당 부분이 이러한 체벌, 혹은 구타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몸으로 경험하고, 기억한 것이기에 쉽게 떼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체벌은 특별한 이유 때문에 가해지는 것이 아닌 단지 ‘일상화’된 습관처럼 그냥 행해지고, 가끔은 자신이 당했거나 경험했던 것처럼 ‘군기잡기’의 명목으로 행해진다. 이 모든 것이 어릴 적부터 겪어온 경험의 재생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절대 권력자”로서의 지도자

이러한 경험을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동부 지도자를 맡고 있는 현 상황은 어린 선수들에게 인권의 차원에서 매우 위험한 조건을 제공한다. 심리학자들은 폭력이나 체벌의 기억은 학습되고, 전이된다고 주장하면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맞은 놈이 때릴 줄 안다”란 전제를 긍정한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폭력의 경험이나 과도한 군사문화적 환경에 젖어왔던 사람들은 자신이 지도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같은 방식으로 선수들을 지도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운동부처럼 지도자의 권한이 거의 절대군주처럼 되어 있는 소위 ‘1극 체제’에선 그러한 폭력적 실천에 대응할 여지가 없어진다. 생각해보라. 지도자에 의해 자신의 시합출전권도, 운동선수로서의 생명도, 나아가 향후 진로의 문제까지도 모두 결정되는 구조에서 그 누가 절대권력자에게 대들 수 있겠는가? 침묵만이 살길이다. 고분고분해지면서 ‘예스맨’으로 남는 것이 살아남는 데 필요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앞서 제시된 초등학교 야구부 구타 사건에서 학부모나 학교가 모두 쉬쉬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웃지 못 할 사건이 하나 있다. 왜, 지난 1월14일 한 인터넷 동영상 전문 사이트에 뜬 A대학교 농구부 감독 B씨를 기억하는가?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호통을 치며 손찌검을 하던 그 동영상 말이다. 마치 K-1를 보는 듯하다 하여 그때 당시 “라커룸의 K-1”이란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동영상 화면에 “2008-11-20”이라는 촬영일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농구대잔치 조별예선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싶다. 폭행의 이유는 전반전에 상대팀에게 큰 점수차로 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결국, 이 감독 징계먹고 1년 자격정지 당했다.

그런데,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이 감독이 징계를 먹기 전 자신과 친분이 있던 고등학교 농구부 감독의 경기를 관전하러 가, 그 시합에서 뛰고 있던 선수들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학교 선수도 아닌데, 단지 친구가 맡고 있는 농구부 선수들을 전반 끝나고 학부모가 보는 앞에서 패버린 것이다. 더 어이없었던 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식을 패고 있는데, 그 해당 학부모는 아무 말도 않고 그걸 보고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왜? 그 감독이 유명한 대학의 감독이라는 것 때문에. 내 자식 앞길 망칠까봐.

이처럼 한 운동부의 지도자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하는 현 스포츠 구조는 그들의 일상적 폭력을 합리화하고 ‘당연시’해주는 하나의 기제로 작동한다. “찍히면 죽는다”는 걸 알기에, 찍히지 않고자 그저 학부모와 선수들, 나아가 해당 학교까지 모두 ‘침묵모드’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의 폭력은…

한국체육계에서 폭력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지난 2008년 11월에 시사기획 <쌈>에서 보도한 지도자의 선수폭력 문제로 한때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했지만, 냄비근성에 의거, 이 감자는 다시 차디차게 변하여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었다. 간간히 터지는 사건에 미디어가 움찔할 뿐, 근본적인 대책은 전무한 상황에서 운동하고픈 학생들은 오늘도 쥐어터져 나간다.

많은 지도자들이 운동하면서 맞는 것이 나중에 성공하고 나면 다 ‘추억’이 된다고 말하곤 한다. “내가 운동할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내가 말야”식의 언술은, 자신의 밑에 있는 선수들에게 폭력을 받아들이라는 또 다른 강압으로 작동하면서, 전반적인 체육계 문화에서 폭력을 용인하는 담론의 기능을 한다. 그 누가 토씨를 달 수 있을까. 자신이 하늘처럼 모셔야 할 감독/코치께서 맞으면서 운동하셨다는데.

하지만, 실제로 뺨을 맞고, 엉덩이에 야구방망이로 구타수준의 체벌을 당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내가 운동할 적엔 말이야”라는 추억의 언술이 “악몽”의 경험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신이 왜 맞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냥 ‘운동선수는 맞아야 한다’, ‘그래야 진짜 선수가 된다, 성공할 수 있다’는 대의명분에 억눌려 그 모든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현 상황은, 분명 그들에겐 인내하기 어려운 끔찍한 나이트메어에 불과할 뿐이다.

정말이지, 맞아야 운동 잘 할 수 있다는 생각 좀 버리자. 맞으면 운동을 잘 하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플 뿐이다. 때리면서 선수들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코칭이라고 믿는 지도자들, 그냥 쉽게 가려고 하는 것뿐이다. “이건 사랑의 매야”나 “널 생각해서 때리는 거야” 식의 어떠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체벌은 어디까지나 체벌이고, 폭력이다.

폭력이 일상화된 한국 체육계에서 무서운 것은 폭력의 일상화가 지도자 스스로 그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내가 때리면서도 그것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맞는 자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며, 나아가 그 행위를 자랑스러워하는 그 모든 행위와 사고의 집합체는, 결국 지금 맞는 선수들이 향후 지도자가 되었을 때, 똑같은 구타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토양분으로 작용할 뿐이다. 폭력은 학습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맞아야 운동 잘하고, 진짜 선수가 되는 건 아니다. 맞으면 그냥, 아프다.

체육교사로서의 직업정체성을 고민하며 충남대에서 200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 스포츠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의 스터디 그룹인 ‘세미나리움’의 실장을 하고 있고, 미디어와 젠더, 운동장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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