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서 기세등등하던 트럼프가 몰락하고 있다. 이전부터 그치지 않던 성희롱 시비에도 꿋꿋이 버티던 그였지만 방송 진행자와 주고받은 외설적 대화가 공개되면서 결정타를 먹었다. 그는 궁지에 몰리자 더 공격적이 되었고, 선거조작설까지 꺼내들었지만 대세를 뒤집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번 일이 있기 전에, 미국과 우리나라 주류언론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보도만을 접했을 때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미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미국 정치에 밝은 전문가 일부는 그의 지지가 근거가 있으며, 그가 이길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았었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은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중하위층의 중년 백인이라 한다. 그들은 선진국 가운데 최악이고 역사상 최악인 미국 불평등의 피해자들이다. 불평등의 핵심 원인은 월가로 대표되는 카지노 자본주의와 이를 옹위하는 미국의 기성권력(establishment)이다. 트럼프는 그들에게 이런 진실을 제시하는 대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민자와 무슬림을 분노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제공한 것이다. 트럼프의 막말은 이들의 분노를 대신하고 한층 더 자극하는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라고 한다. 물론 트럼프의 공격은 이민자와 무슬림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기성권력도 아울러 공격했다. 월가와 결탁했을 뿐 아니라 기성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클린턴이 그동안 고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비록 야비한 전략을 동원했지만, 트럼프는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는 갖추고 있다. 국민들 특히 약자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꼽은 정치인의 세 가지 중요한 자질은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이다. 그 가운데 열정은 대의에 대한 헌신이고, 대의는 곧 민심 즉, 국민이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정은 국민이 분노하면 그들과 함께 분노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성공은 불평등의 피해자들 – 더 열악한 피해자들과 연대하기보다 그들을 외면한 문제가 있지만 – 을 대변하는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국민과 약자를 위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분노하기 시작한 순간 정치인에서 일개 불평불만분자로 전락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 정치적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가 통합되어 있었다. 왕권과 신권의 분리를 근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지만 표피적 관찰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소명은 우선 내면적 신념을 지칭한다. 외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신과의 대화를 통해 신의 부름에 응답하고 복무하는 것이다. 이제 정치인에게 신은 곧 민심이고 국민이다. 국민과의 고독한 대화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읽고, 국민의 부름에 응답하고,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정치인의 핵심 자질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분노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트럼프보다 더 정확하게 미국 국민의 분노를 대변했던 샌더스의 열풍은 '월가를 점령하라'는 분노 운동에 일부 빚지고 있다. 스페인의 신생정당 포데모스의 뿌리는 '분노한 사람들'이란 대중운동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우리 정치인들로부터 국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사자후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 국민을 위한 분노가 아닌 엉뚱한 소음만 내고 있다. 친박은 박근혜를 위해 단식하고, 박근혜를 위해 분노하고 있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식이다. 일부 친노는 국민의 한이 아니라 노무현의 한을 위해 분노한다. 분노의 공적 의미를 혼동한다.

다시 분노의 정치가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정치인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한다. 통합해야 한다고 한다. 강자의 논리다.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무의미하고, 정의 없는 평화가 거짓이듯이 분노를 거치지 않는 통합은 국민사기극이다. 이재명 시장의 약진은 그가 제대로 분노할 줄 알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불거진 후에 "이런 야만적 불법행위와 권력 남용을 자행하는 현 정부와 대통령은 탄핵 대상이 아닌가요"라 일갈했던 박원순 시장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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