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멋진 카페에서 수아는 남편과 만났다. 무척이나 사무적이고 건조한 만남. 용건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수아에게 남편 진석은 뭘 그리 빨리 일어서냐고 한다. 새삼스레 정을 돈독히 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저 여자를 대하는 습관 혹은 예의 같아 보였다. 그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지만.

일어서서 나오는 수아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카페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 도우였다. 도우도 똑같이 수아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반갑기도 하고, 덜컹 겁이 나기도 한 순간이었다. 도우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진석이 수아 곁을 쌀쌀 맞게 지나며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KBS2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

수아는 힘겹게 겨우 한 발짝씩 뗐다. 도우도 움직였다. 수아에게 다가서려는 마음 반, 수아의 무거운 발걸음을 줄이려는 마음 반으로 걷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스치는 순간 도우는 말없이 수아의 손을 빨리 잡았다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툭 하고 건들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수아는 그의 체온에, 그 체온에 담긴 너무도 많은 이야기에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버렸다.

정말 짧은 몇 걸음. 그리고 은밀하게 손가락 몇 개를 살짝 잡았다 푸는 그 은밀한 동작. 준비한 것도 아닌, 기대한 것도 아닌 그저 상대를 향한 간절함이 빚어낸 본능의 반응. 도대체 누가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었을까. 그저 감탄이고, 가슴 아린 슬픔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토록 절절한 몇 걸음이 또 있었을까? 중국의 역사에는 정말 목숨을 건 일곱 걸음이 있었다. 조식의 칠보시라는 것인데 같은 형제에게 죽음을 당할 상황에서 조식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일곱 걸음에 시를 짓는 것뿐이었다. 이런 가슴 아픈 멜로 이야기를 하다가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목숨을 건 조식의 일곱 걸음이나 한 마디도 못하고 지나쳐야 하는 두 사람의 몇 걸음이나 그 절실함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그 장면은 치명적이었다.

KBS2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

그렇게 스친 후도 정말 압권이었다. 수아는 돌아섰고 여전히 눈물이 범범인 얼굴이다. 그런 수아를 보며 도우는 오히려 웃어 보였다. 도우의 심정도 역시나 웃을 힘이란 한 줌도 남아있지 않을 탈진의 상태였겠지만 가슴 속에서 무조건 웃어야 한다는 지휘에 따라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멋지다. 남자가 봐도 너무 포근해서 반할 지경이다.

진석이 있더라도-물론 진석은 아내가 어디쯤 오나 뒤돌아볼 사람도 아니지만- 수아는 그대로 나가버릴 수는 없었다. 도우를 돌아봤다. 여전히 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수아를 향해 도우는 아주 옅은 미소를 보냈다. 안심하라고, 나는 괜찮으니 편히 지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차피 이별을 선택한 그들은 괜히 아무 것도 아닌 때에, 아무런 장소에서 결국 사무치게 될 것이라면 그렇게 운 기억 하나를 가슴에 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공항 가는 길> 10회 엔딩 장면에 대한 것이다. 아픈 주사를 맞은 것처럼 가슴께가 아리고 먹먹한 장면이었는데 막상 글로 쓰니 그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장면은 직접 봐야 할 것 같다. 수도 없는 드라마를 봤고, 수많은 멜로신을 봤지만 이처럼 은밀하고 아련한 장면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장면 때문에 잠을 설친 이들 참 많을 것이다. 또 조금 울었어도 어떻겠는가. 앞으로 또 어떤 장면이 나올까 기대도 하지만 어쩌면 이 장면으로 이 드라마는 이미 절정을 찍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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