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나치 히틀러에 의해 추방된 이산의 비극적 주인공 브레히트. 눈길이 가는 작업실 큰 기둥에 ‘진실은 구체적이다’는 격언을 붙여놓았다던 그가 쓴 망명시의 하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2009년이라는 수상한 시대, 사태의 현실에서도 똑 같은 말을 되 뇌이게 됩니다. 참으로 오랜 암울한 시절을 함께 버티고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그러면서도 용감하게 진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못하고, 일관되게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진한 반성의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상한 시절에 폭력의 현실, 억압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게 이미 죄악입니다. 침묵을 지키는 게 ‘시류에 편승하는 자들’ 만큼이나 나쁜 짓이라고 브레히트가 정리하지 않았습니까? 『전쟁교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미래 파시즘의 예언으로 맺은 지식인이 내린 단호한 비판이기에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기 저것이 하마터면 세계를 온통 지배할 뻔했었지.
다행이도 민중들이 저것을 지배했어. 하지만 난
자네들이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어.
저것이 기어 나온 그 자궁이 아직도 생산능력이 있기에.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면 그 괴물의 출현 가능성을 대비하고 경고하고 방지하는 사회보호, 생명보존의 성실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촘스키는 지식인을 또 어떤 존재로 정의했나요? 권력이 원하는 말을 그럴듯하게 나불댈 수 있는 전문가와 다른 지식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지식인을 ‘임(being)’의 존재가 아닌, ‘행함(doing)’으로서 ‘됨(becoming)’의 존재로 정확히 규정하지 않았습니까? 보다 나은 삶의 전망과 경로를 분명하게 제시코자 노력하는 자, 그러기 위해 현실 내 폭력과 모순․억압의 실상을 정확하게 읽어내고자 분투하는 자로 정의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래디컬’한 것과 ‘진보적’인 것을 지식인의 두 조건으로 상정한 것입니다. 오해마시길. 실체적 규명을 위한 ‘진실과정(truth-process)’의 작업에 몰두하는 태도로서의 ‘래디컬’이자, 지배의 현상(status quo)에 정주하지 않는 변형적․실험적․창조적 자세로서의 ‘진보적’입니다.

이 시대에도 그런 지식인들이 분명 있습니다. 모순에 맞서 분투해온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항상 지식인입니다. 2009년 비참의 현재를 민주주의 위기 상황으로 정리하고, 민주주의 위기 극복의 비전을 제시코자 함으로써 교수들도 지식인이 됩니다. 시국선언이 이어집니다. 일방권력과 치안상태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언론해방과 집회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는 명백한 지(식인)적 실천입니다. 이를 두고 일부의 목소리라고 폄하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진실교전의 무게감과 신념표현의 진지함으로 다수의 전문가들을 제압할 수 있는 게 지식인의 역능 아닙니까? 현실 정리, 여론 대의, 대중 의무의 지식인적 윤리는 소수적이기 때문에 빛이 납니다. ‘왜 늦게 나와 뒷북이냐’며 비꼬지 마세요. 서로 격려해줍시다. 지금과 같은 공포 분위기에서는 양심에 따라 발언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이 모두 선한 지식인, 바른 지성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주저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 전국에서 이명박 정부의 전면적인 국정 기조 쇄신을 요구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그래픽
지식인을 교수들로 제한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대학생들의 발언, 청소년들의 선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현실, 불투명한 미래를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책임져야 할 청년 지식인들의 발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척 아려옵니다. 누가 이들의 정의로운 목소리를 묵살할 겁니까? 시국선언의 지적 결행은 협의한 대학, 학교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서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종교인, 문인들도 빠지지 않습니다. 6월 9일자 작가선언문을 읽어보면, 그 집단발언의 결기와 집단창작의 내용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당하게 내놓은 빼어난 문장, 탁월한 언어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이 지닌 명징한 의식, 그들이 공유한 진지한 상식은 어떤 지성의 텍스트들보다 아름답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젊은 작가들의 살아있는 글 그 자체입니다. 삶 즉 생명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자꾸만 우리를 눈물 나게 합니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붉고 모든 죽음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그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얼마나 준엄한 현실 고발입니까? 이 보다 더 냉혹한 권력 비판이 있겠습니까? 누가 이 시대 대중의 슬픔, 인․민의 분노, 시민의 환멸을 더 뛰어난 말로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상상력의 자유로운 개진을 통해 창작에 몰두해야 할 작가들이 사랑하는 독자가 아닌, 미운 현실을 향해 통렬한 고발장을 내놓은 것입니다. 권력과 함께 ‘민주주의의 조종을 울린 종지기’들을 역사의 기록자로서 규탄하고 있습니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분노하면서, 저널리즘의 실패를 가차 없이 응징합니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고 단언했습니다. 문학의 이름으로 야만을, 인간적 지성의 입장에서 야수적 폭력의 현실을 철저히 고발해 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언어를 지키고, 정의로운 글을 만들며, 행복한 인간을 키우려는 젊은 작가들의 집단 결기, 직접 행동입니다.

물론 권력은 22년 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발언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소통’이라는 단어는 쑥 들어간 지 한참 오래됩니다. 수구매체도 냉소적이고 적대적이기만 합니다. 현실을 아우슈비츠라고 “갖가지 악담을 다 개진하면서 위기를 말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 또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궤변을 늘여놓습니다. 참을 수 없는 ‘민주주의’의 가벼움. 지성적 행동을 “독선주의, 국민을 편 가르기 하는 분열 획책”이라 헐뜯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허위, 지성인이 아니라 반지성”이라는 험담에서 나아가, “헌법국가 대한민국 정체성․정통성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불순한 시도로 매도합니다. 사람이 이념이고 문학이 배후이며 문장이 무기라는 작가들의 발언은 무시무시한 반체제 격문이 됩니다. 이런 <문화일보> 식의 ‘데마고그(선동)'은 앞으로 훨씬 조직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잔혹의 수사가 더욱 노골적으로 준동할 것입니다. 공포의 치안상태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 폭력, 구조적 불안이 지성적 존재들의 출현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입니다. 권력에 반해 사회를 보호코자 하는 착한 자의 선한 행동을 또렷이 부각시킬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혐오와 경멸, 폄훼와 왜곡의 공세까지도 예견한 상태에서 이어지는 발언이라 고결한 것입니다. 폭력의 칼질에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가르치는 자, 공부하는 자, 글 쓰고 말하며 표현하는 자의 자기역할을 주저하지 않기에 참 언론인, 바른 시민의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침묵을 강제 당한 개인, 회집의 광장에서 배제된 ‘나’를 대신하기에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 불안한 자들을 위로하고 흔들리는 자들을 잡아주는, 두려움 없는 진실 발언의 모든 파르헤시아트들. 2009년 6월 10일, 11개월 만에 다시 열린 서울광장의 행동하는 지성대중을 지켜보면서, 뼈저린 반성과 배가된 각오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나는 내게 위임된 지식인의 역사적 책무를 어떻게 행할 것인가?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